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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성과연봉제 폐기, 그 후

입력
2017.10.17 20: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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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토요일, 21일은 취업준비생들에게 결전의 날이다. ‘신의 직장’이라는 금융공공기관 9곳이 동시에 필기시험을 치른다. 서류심사를 통과한 ‘엄선된’ 응시자 4만명 가량이 기껏해야 700명 정도의 최종 합격자 티켓을 거머쥐기 위해 가슴을 졸이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 블라인드 채용을 표방한 터라 정확한 분석은 어렵지만, 어지간한 스펙으로는 명함도 내밀기 힘들 거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들은 그래서 ‘A매치’라고 부른다.

알려진 대로 이들 금융공공기관의 처우는 타기업들을 압도한다. 신입사원 초봉이 5,000만원에 육박하고, 직원 평균 연봉은 1억원을 오간다. 국세청 통계를 보면 2015년 기준으로 대한민국 근로자 상위 5%의 연봉이 8,887만원이라니, 이들은 직장에서 대충 10년 이상만 버티면 상위 1, 2%의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공공기관은 업종 내에서 독과점 지위를 누리고 있으니 살아남기 위해 기를 쓰고 덤벼들지 않아도 되고, 알음알음 유관기관이나 산하단체로 재취업할 길도 열려있다.

투자의 귀재라는 짐 로저스가 두 달 전 한국을 방문해서 찾은 곳은 뜻밖에도 노량진 고시촌이었다. 자극을 주기 위한 다소 의도적인 발언이었겠지만, 그는 “한국은 더 이상 매력적인 투자처가 아니다”고 했다. 가장 큰 이유로 한국 젊은이들의 고시열풍을 들었다. “안정만 추구하는 한국 젊은이들의 고시열풍이 국가 경쟁력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얘기였다. 최우수 인재들이 금융공공기관으로 일제히 몰려드는 것 역시 그의 눈에는 같은 현상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이들 공공기관에 성과연봉제를 도입하겠다고 했을 때 적어도 그 취지에 대해서만큼은 고개를 끄덕인 건 그래서였다. 공공성이 강조되는 곳에서 어떻게 제대로 된 성과 평가가 가능하겠느냐, 결국엔 저성과자에 대한 손 쉬운 해고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 이런 노조 반발도 충분히 이해는 됐다. 그럼에도 최소한 직무에 따른 급여의 차등, 그리고 어느 기업에나 있는 ‘무임승차자’를 걸러낼 장치는 마련해 놓는 게 타당하다고 봤다.

문제는 절차였다. 시한을 정해놓고, 그 시한을 맞추기 위해 노사 협의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이사회 의결 만으로 일방통행 식으로 밀어붙인 건 명백한 위법이었다. 혹자는 “어렵게 도입한 걸 정권이 바뀌었다고 손바닥 뒤집듯 뒤엎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지만, 나는 문재인 정부가 공공기관 성과연봉제를 폐기 처분한 건 옳은 결정이라고 봤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다. 성과연봉제는 지금 문재인 정부가 청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과거 정부 적폐들-국가정보원, 군사이버사령부, 국정교과서, 4대강 등-과는 분명히 달리 봐야 할 지점이 있다. 청산의 대상이 절차이지 제도 그 자체이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정부도 이런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본다. 성과연봉제 대신 직무급제 등 다양한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하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이 정부 들어 부쩍 입지가 넓어진 노조가 정부가 어떤 대안을 내놓더라도 단 1%라도 그들의 철밥통에 흠집이 간다면 덥석 받아들 거라고 기대하기 힘들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넛지’의 저자이자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세일러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으면서 ‘넛지효과’가 다시 주목을 받는다. 무조건 찍어 누르기보다, 팔꿈치로 옆구리를 살짝 찌르듯(넛지ㆍNudge) 자연스럽게 타인의 합리적 행동을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노조가 먼저 나서길 기대하기 어렵다면, 다시 정부가 나서야 한다. 물론 방식은 달라져야 한다. 남자화장실 소변기에 파리를 그려 넣어 ‘정조준‘을 유도했듯, 그들의 철밥통에 무엇을 그려 넣어야 자발적으로 나서도록 이끌 수 있을지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성과연봉제 폐기가 끝이라면 정말 한국 경제의 미래는 암울할지 모른다.

이영태 정책사회부장 yt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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