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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라인 →전관수역 → 중간수역… 독도는 점점 외로워졌다

입력
2015.08.03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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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한일 어업협정, 日 어업침략 막기 위한 이승만 라인

포기 대가로 9000만달러 차관 받아 어장 남획 막을 단속권도 후퇴

1998년 신어업협정, 영해 12-경제수역 200해리 골자

유엔 협약 발효 맞춰 어업권 재협상, 독도 둘러싸고 중간수역 설정

지난 2005년 일본 EEZ에서 불법 조업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통영선적 장어잡이 통발어선(오른쪽에서 두번째)을 가운데 두고 일본 순시정(왼쪽 2척)과 우리 해경 경비정(오른쪽)이 울산 울주군 간절곶 동방 16마일(28.8km) 지점에서 신풍호를 각각 밧줄로 묶고 대치하고 있다. 한일 간의 어업 경쟁은 1998년 배타적 경제수역(EEZ) 체제를 근간으로 한 신어업협정이 체결된 이후 더욱 치열해졌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2005년 일본 EEZ에서 불법 조업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통영선적 장어잡이 통발어선(오른쪽에서 두번째)을 가운데 두고 일본 순시정(왼쪽 2척)과 우리 해경 경비정(오른쪽)이 울산 울주군 간절곶 동방 16마일(28.8km) 지점에서 신풍호를 각각 밧줄로 묶고 대치하고 있다. 한일 간의 어업 경쟁은 1998년 배타적 경제수역(EEZ) 체제를 근간으로 한 신어업협정이 체결된 이후 더욱 치열해졌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일 양국을 가르는 바다가 거칠다. 지금도 어업, 배타적 경제수역(EEZ), 해양조사, 동해 및 해저 지명 문제 등을 둘러싸고 양국은 한 치 양보 없는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바다를 둘러싼 한일 간의 마찰은 어장(漁場) 및 지하자원 확보라는 국익과 직결되는데다, 특히 역사 문제이기도 한 독도 논란과 맞물리면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여 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한일 양국은 국제적 해양 레짐에 순응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어업협정을 체결하는 등 지난 50년간 그런대로 안정적인 해양 질서를 구축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

평화선이 전관수역으로 대체된 경위

한일 간의 최초의 어업교섭은 국교정상화라는 큰 틀과 연동되어 1951년 이후 14년간의 진통 끝에 1965년에 타결됐다. 이때 가장 큰 쟁점이 된 것은 한국의 평화선(이승만 라인)을 대체할 전관수역(專管水域)의 설정 문제였다. 평화선은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선언한 해양주권선을 말하는데, 그 목적에 대해선 여러 해석이 있지만 무엇보다 당시 어업 능력이 월등했던 일본의 ‘어업 침략’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은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 어선을 대거 나포함으로써 연안 어장을 보호하고자 했고, 이에 대해 사실상 속수무책이었던 일본은 어업협정을 통해 평화선을 무력화하고자 했다. 어업협정 체결 전까지 한국은 평화선 수역에서 일본 어선 326척(선원 3,094명)을 나포했다. 요컨대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에서의 어업 문제는 한국이 평화선 선포를 통해 지키고자 했던 이익을 어떻게 보전해줄 것인가에 모아졌다.

결국 양측이 1965년 최종적으로 합의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12해리의 어업전관수역을 설정하고, 한국의 전관수역에만 그 외측에 공동규제수역을 설정한다. 둘째, 공동규제수역 내에서의 어업에 관한 단속 및 재판 관할권은 어선이 속하는 체약국만이 행사하는 ‘기국주의’(旗國主義)를 채택한다. 결국 1965년 어업협정에서 한국은 당시 국제적 관행이던 3해리 영해가 아니라 전관수역 12해리와 공동규제수역을 인정받았다. 이에 대해 일본은 전관수역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골칫거리였던 평화선을 실질적으로 폐지한데다, 기국주의를 관철함으로써 한국이 함부로 일본 어선을 나포할 가능성을 차단했다. 이를 두고 당시 한국에서는 평화선를 팔아먹었다는 비난과 더불어 일본 어선의 남획을 막을 ‘단속’ 조항의 훼손이 크게 부각되어 협정 반대 운동이 격렬히 전개됐다.

‘진한 분홍색’이 만들어낸 격세지감

다만 돌이켜보건대 1965년 어업협정에서 보다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사실상 평화선을 포기하는 ‘대가’로 챙긴 9,000만달러 상당의 어업차관의 효과이다. 1965년 3월 김동조 주일대사가 “어떻게든 진한 분홍색을 칠해 달라”고 매달린 끝에 일본 정부가 보증을 서는 형태로 얻어낸 어업협력 및 선박수출차관으로 한국은 일본의 중고 어선 등을 값싸게 사들여 어선 능력의 대형화 및 현대화를 도모했다. 그 결과 평화선을 없애면 한국 어업이 일본 어업에 종속될 것이라는 어민들의 당초 우려와는 달리, 한국 어업은 오히려 일본의 연근해 어업을 크게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다. 마침내 1977년 이후 동해 최대의 황금어장으로 통하는 대화퇴(大和堆)와 홋카이도 해역에서 일본 어선보다 한국 어선이 더 많이 조업하는, 어업 능력의 역전이 이뤄졌다.

당연히 한일 간에 어업 마찰이 빈발했다. 여기에 1980년대 이후에는 중국 어선마저 가세하면서 일본 주변수역의 일부 어장은 어장과 어구가 파괴되는 등 황폐화되기에 이르렀다. 과거 한국 연안에서 일본 어민 간의 과다 경쟁으로 어장이 말라붙은 것과 같은 상황이 일본 주변수역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런 상황은 일본이 어업협정에서 자국 어선을 보호하기 위해 끝까지 고집했던 ‘기국주의’가 오히려 일본에게 단속권을 빼앗는 족쇄가 됐음을 의미했다. 격세지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과거 평화선 철폐를 요구하며 공해 자유의 원칙을 주장했던 일본이 1980년대 초반부터 어업협정의 개정을 집요하게 요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은 절대적으로 유리해진 협정을 굳이 바꿀 이유가 없었다.

유엔해양법의 재편과 한일 신어업협정

일본에게 반전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94년 11월이다. 영해 12해리, 경제수역 200해리를 골자로 하는 유엔해양법협약이 발효된 것이다. 공해 자유의 원칙에 따라 해양을 자유롭게 이용한다는 종래의 해양법이 바다를 나눠 각각의 연안국가가 해양자원을 보존하고 이용하게 한다는, 새로운 해양레짐으로 변경된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1996년 잇달아 이 협약에 비준함으로써 어업협정 또한 EEZ 체제를 근간으로 재편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국내 어업단체와 정치권의 압력을 명목으로 타결 시한까지 제시하며 한국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반면, 한국은 기존 어업협정을 통해 누려온 이익을 유지하면서, 특히 독도 영유권에는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가운데 일본측의 공세에 대응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신어업협정은 1996년 3월 방콕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과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일본 총리 간의 회담에서 영유권 문제와는 별도로 EEZ 경계획정과 어업교섭을 진행키로 합의함으로써 진전을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실제 교섭이 진행되자 역시 독도에 대한 의견차가 부각되면서 난항을 거듭했다. 교섭이 지지부진하자 일본은 한국 어업의 일본 어장 의존도가 높다는 점을 이용해 국내법을 개정해 한국 어선에 대한 단속을 대폭 강화했다.

이런 가운데 1997년 3월 일본은 제4차 어업실무자회담에서 EEZ 경계획정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어업문제만을 잠정적으로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한국은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EEZ 경계획정을 명분으로 어업협정 체결마저 미룰 경우 어민의 피해가 확대될 것으로 우려, 1997년 8월 울릉도와 오키(隱岐) 군도의 중간선을 경계선으로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일본측 수석대표인 야부나카 미토지(藪中三十二)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은 울릉도와 오키섬의 중간선을 어업 경계선으로 할 경우 독도가 한국측 수역에 포함되므로 수용할 수 없다고 맞섰다.

이렇게 양측이 독도를 둘러싼 원칙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1965년 어업협정상의 ‘공동규제수역선’을 이용하자는 일본측 제안과 함께, 독도는 12해리의 영해만 갖고 양국 모두 EEZ를 주장하지 않으면서 주변수역은 중간수역(일본명 잠정수역)으로 하는 안이 급부상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대화퇴 어장을 한국에 내줬다는 국내 비판에 직면, 일방적으로 1965년 어업협정의 파기를 선언하는 강수를 두기도 했다. 결국 양국이 독도를 불문에 부치는 선에서 중간수역을 설정하는 방향으로 합의하면서 1998년 11월 새로운 어업협정이 탄생했다.

독도와 한일 해양경계

신어업협정 체결 이후 한국 내에서는 ‘실패한 교섭’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역시 비판의 초점은 중간수역 내에 위치한 독도에 모아졌다. 독도 주변의 12해리의 영해가 중간수역으로 둘러싸여 있어 신어업협정이 독도 영유권을 훼손했다는 것이다. 즉, 어업권 또한 주권적 영유권에서 연유하므로 독도의 법적 지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사실 일본의 눈으로 보면 독도 주변 12해리는 ‘다케시마’의 영해인 12해리가 되는데, 신어업협정 어디에도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았다. 더욱이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EEZ로 선포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이 EEZ의 기점을 독도로 하지 않고 울릉도로 삼은 것은 한국이 독도 영유권을 포기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이에 대해 한국 외교부는 신어업협정은 그야말로 어업에 한정된 협정으로 영유권 문제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1965년 어업협정에서 독도 주변수역이 공해였음에도 불구하고 독도의 법적, 실효적 지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던 것처럼 신어업협정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 헌법재판소는 2001년과 2009년 각각 신어업협정이 EEZ 경계획정이나 영토문제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을 거듭 확인했다. 사실 신어업협정 상의 독도 및 중간선은 앞서 체결된 중일 어업협정에서의 센카쿠(尖閣, 중국명 댜오위다오) 및 주변수역의 예와 유사하게 처리됐다. 만약 당시 일본이 주변수역의 공동관리가 센카쿠의 영유권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다면 중국과의 협정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2006년 일본과의 EEZ 경계획정 교섭을 앞두고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EEZ의 동쪽 한계선의 기점을 울릉도에서 독도로 변경한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한일 모두 독도를 기점으로 EEZ를 주장하면서 EEZ 교섭은 2010년 이후 중단된 상태이다. EEZ 경계 교섭은 어업협정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여서 독도 문제를 피해갈 방법이 없어 보인다. 일본이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을 인정하면 문제는 사라지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이러한 가능성은 없다. 해방 70년을 맞았는데도 한일 간 바다의 ‘분리’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셈이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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