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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라 신고', 만약 당신이 기자였다면?

입력
2017.01.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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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하기로 했다면 기자는 순수한 관찰자로 남아야 하는가. 미디어 윤리와 관련한 논의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보도하기로 했다면 기자는 순수한 관찰자로 남아야 하는가. 미디어 윤리와 관련한 논의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기자들이 딜레마에 부딪혔다. 2일 JTBC의 정유라(20)씨 신고 보도가 계기다. JTBC 취재진은 덴마크에 잠적해 있던 정씨를 찾아 현지 경찰에 신고하고 체포 과정을 단독 보도했다. 시민들은 기자의 취재윤리를 두고 갑론을박했다. “언론은 관찰자로서 취재 보도할 뿐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어겼다”는 비판에 즉각 반론이 뒤를 이었다. 인터폴 적색수배 절차가 진행 중이던 범죄자 신고는 시민의 의무이자, 진상규명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기자는 당연히 시민이자 인간으로서 윤리와 의무가 있다. 하지만 시민의 의무와 기자의 의무가 늘 일치하지는 않으며 어떤 경우엔 선후와 경중을 따지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관찰자인 기자가 왜 개입했냐”는 지적은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간다. 기자는 왜 관찰자여야 하는가. 그 동안 관찰자였던 것은 맞는가. 경우에 따라 사건에 개입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개입하고 있다면 그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당신이 기자라면 정유라씨를 신고했을까.

의무감 있는 관찰자

‘관찰하되 개입하지 않는다’는 저널리즘의 오래 된 원칙이다. 현대 저널리즘의 대부 월터 리프만은 기자의 정체성을 초연한 관찰자, ‘사건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는, 담장 위에 앉은 파리’라고 정의했다. 언론보도의 불편부당을 강조한 원칙이다. 하지만 뭘 관찰할지 정하는 것부터 사실상 개입이니 차라리 ‘의무감 있는 관찰자(committed observer)’가 돼야 한다는 담론이 뒤를 이었고, 적극적 참여관찰을 강조하는 곤조 저널리즘(gonzo journalism)도 나왔다.

그동안 한국 언론에 대한 비판은 주로 논조에 따른 왜곡 편향 보도였다. 이념에 따라 취사선택된 팩트로 실체를 왜곡하는 문제에 비하면, 사건에 개입하는 문제는 오히려 덜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기자들이 크고 작게 사건에 개입하는 일은 부지기수다.

정부 부처나 수사기관, 정치권 등 취재 대상과 정보를 주고 받는 것까지야 개입은 아니라 쳐도, 이 과정에서 수사가 착수되게끔 입건시키는 경우가 있다. 중앙 일간지의 한 차장급 기자는 “비리를 제보받아 취재하다보면 계좌를 추적해 확증을 잡아야만 보도를 할 수 있는 한계상황에 부딪힐 때가 있다. 그밖에 달리 비리내용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면 제보자와 상의해 수사기관에 넘기는 일이 드물지 않다”고 말했다. 기자들이 수사당국을 인용하지 않은 채 보도했다가 언론중재위원회 제소나 법정 소송에 몰리기 십상이라는 위기감 때문에 사건화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신고정신 투철한 시민의 의무인가, 기사를 보도하기 위한 개입인가. “기자가 늘 공익적 목적에서 제보를 한다는 보장은 없다”는 위 기자의 지적은 기자가 사건에 개입할 때 불거질 수 있는 문제를 알려준다.

보도를 위한 개입이 불법적 수단을 동원할 정도면 분명 문제다. 최근 KBS ‘제보자들’ 제작진(외주제작사)이 빚 때문에 업주에게 폭언, 폭행을 당했다는 자동차 정비사 A씨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몰래카메라 설치를 요구했다가 A씨를 곤경에 몰아넣은 사실이 뉴스1 보도로 알려졌다. A씨가 설치한 몰래카메라가 업주에게 발각돼 형사처벌을 받을 위기에 놓인 것이다. A씨는 본보와 통화에서 “4,5번 계속 거절을 했는데도 제작진이 ‘업주가 폭언, 폭행하는 영상이 없으면 방송을 내보내기 어렵다’고 해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줬다가 이렇게 됐다”며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누가 언론을 믿고 제보를 하겠냐”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 제작진은 “설치는 서로 합의 하에 했다”며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구체적 사례에 따라 불가피한 개입이냐, 비난받을 일이냐는 판단은 엇갈리지만, 기자가 순수한 관중이 아닌 선수로 뛰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개입이 한 번 시작되고 용인되면 선의로도, 악의로도 확장될 수 있고 그 수단과 목적은 언론인의 양심에만 맡겨져 있다.

때로 취재하는 현실에 깊이 이입되면서 어쩔 수 없이 발을 담그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 영국군 부대와 함께 이동하며 보도한 종군기자인 보스턴 헤럴드의 쥘 크리텐덴 기자는 바그다드에서 파악한 적군의 위치를 해당 부대에 일러주기도 했고, 함께 일하던 동료가 적군 살해에 개입하는 것도 목격했다. 그는 나름대로 취재와 전쟁 참여 사이에서 균형을 잡았지만 깊은 고민을 기사로 남겼다. “단지 관찰을 목적으로 그곳에 있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취재목적으로 참여한 전투에서 적군 3명의 살해를 도왔다. 윤리 문제를 제기하는 이가 분명 나올 것이다. 나는 논쟁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들은 현장에 없었다.”

최순실씨의 딸인 정유라씨는 덴마크에 머무르다 JTBC 기자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현지경찰에 의해 불법체류 혐의로 체포됐다. jtbc 캡처
최순실씨의 딸인 정유라씨는 덴마크에 머무르다 JTBC 기자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현지경찰에 의해 불법체류 혐의로 체포됐다. jtbc 캡처

명백한 위험을 관찰만 한 죄

개입하지 않은 취재가 늘 칭찬받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취재진이 보도에만 몰두해 시민사회의 비난을 받은 사례가 많다. 통상 ‘구경꾼(bystander) 논란’으로 불린다. 1994년 퓰리처상을 받은 사진기자 케빈 카터가 대표적 사례다. 그는 1993년 수단의 한 식량배급소 근처에서 허기져 웅크린 소녀와 이를 바라보는 독수리를 촬영했다. 그의 사진 ‘굶주린 소녀와 독수리(Waiting game for Sudanese child)’는 뉴욕타임스 등에 실리며 전 세계에 기아의 참상을 알렸고 퓰리처상 수상의 명예도 얻었다. 하지만 카터에게는 “앵글을 잡고 타이밍을 기다린 기자와, 소녀를 노려보는 독수리가 뭐가 다르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에겐 억울한 측면도 많다. 셔터를 누르자마자 독수리를 쫓아냈고, 소녀는 배급소로 향했으며, 취재진이 전염병을 옮기는 매개체가 될 수 있으니 접촉을 삼가라는 가이드라인도 있었다. 동료들에 따르면 카터는 현장을 누비는 내내 괴로워했고 통곡했다. 퓰리처상 선정 소식이 전해지고 며칠 뒤 도심 소요를 취재하던 동료기자가 총격으로 숨진 일도 충격이었다. 가난과 악몽의 고통을 호소하던 그는 시상식 한 달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는 보도윤리 딜레마의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됐다.

1988년 대학생들이 서울 중구 미 문화원을 기습 점거했을 당시 미리 제보를 받은 한겨레신문은 신고보다는 사건 촬영을 위해 현장에 달려가는 길을 선택했다. 전직 한겨레신문 기자는 “나중에 미 대사관 측으로부터 한국 언론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어떻게 방치할 수 있느냐는 항의를 받고 취재협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며 “미 대사관은 점거농성을 테러와 같은 위험으로 간주했지만, 우리 시각에선 학생운동의 일환으로 보도 대상일 뿐 신고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기자들이 사건에 개입해야 할 기준으로 통용되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에 대해서조차 일치된 판단이 쉽지 않음을 보여준다.

의사이자 CNN 기자인 산제이 굽타는 정반대 선택을 했다. 2015년 네팔 지진 현장에서 그는 8세 소녀의 긴급 뇌수술을 스스로 실시하고, 이를 보도했다. 그래도 논쟁은 계속됐다. 박수를 보낸 이도 많았지만, “목숨을 구하는 게 우선이지만, 이 때문에 보도를 포기해야 했다” “뉴스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술 아니냐” “기자들 자신이 영웅이 되려 하면 어떡하느냐”는 지적이 줄을 이었다.

인간과 진실에 복무하는가

기자는 어디까지 사건에 개입하고 어디부터 개입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저 의도성, 방향성을 가진 개입은 절대 안 된다는 정도가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미디어학자 팰립 패터슨은 개입의 기준으로 인간성, 진실을 꼽는다. “숱한 윤리적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도덕 나침반’이 필요한데, 이 와중에 우리가 최후까지 고집해야 하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충성’과 ‘진실에 대한 충성’이다. 미디어 윤리의 어떤 상황도 비인간적 행위와 진실의 유보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인간성과 진실이라는 잣대 앞에서, 다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기자라면 정유라씨를 신고했을까? JTBC는 수사기관보다 앞서 국정농단 핵심인물 중 한 명인 정씨의 소재를 찾았고, 도주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 ‘시민으로서 수배자 도주를 막기 위해 신고가 불가피했고, 이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본다면 기자의 신고는 비난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여기서 논쟁을 끝낼 수 없다. 진실을 추구하는 언론이라면, 도주해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은 정씨 인터뷰를 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남아있다.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는 “기자도 한 시민으로서 신고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면서도 “다만 신고 과정을 하나의 내러티브로 구성해 보도한 장면은 ‘보도를 위한 신고’ 즉 의도성, 방향성이 끼어든 신고로 보일 수 있어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기자가 ‘어떤’ 관찰자여야 하느냐에 대한 고민은 계속된다. 어쩌면 기자생활이 끝나는 순간까지 해답을 얻지 못할 주제인지 모른다. 이런 의견도 들어보자. “우리 언론이 다른 문제가 전혀 없는, 신뢰받고 관심 받는 그런 상황도 아닌데, 이런 고민은 호사스럽다.” 원용진 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의 말이다. “지금은 정답을 단정해 비난하고 말고 할 ‘해답의 시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나름의 기준을 세우고 합의해 갈 ‘토론의 시간’이다”라는 것이다. 어쩌면 열린 것은 판도라의 상자가 아니라 질문의 화수분이다. 각자의 정답을 찾아 고민을 시작할 계기일 뿐이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1993년 수단에서 촬영된 '굶주린 소녀와 독수리(Waiting game for Sudanese child)’. 보도 이후 사진기자 케빈 카터에게는 "취재하는 대신 소녀를 구해야 했다"는 비난이 제기됐다.
1993년 수단에서 촬영된 '굶주린 소녀와 독수리(Waiting game for Sudanese child)’. 보도 이후 사진기자 케빈 카터에게는 "취재하는 대신 소녀를 구해야 했다"는 비난이 제기됐다.

‘미디어 윤리’ 논란, 고민 남긴 국내외 보도들

기자가 때로는 구경꾼(bystander)이기만 해서, 때로는 관찰자(observer)로 남지 않아서 논란이된 ‘개입 딜레마’ 사례는 국내외 모두 적지 않다.

1997년 미국 LA타임스 소니아 나자리오 기자는 마약 중독자 부모와 생활하며 방치된 아이들을 다뤘다가 큰 항의에 부딪혔다. 기사에는 세 살짜리 아이가 떠나는 취재진에게 “나를 데려가 줄 수 있나요”라고 묻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읽은 독자들 수백 명이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 ‘당장 아이를 도와야 한다’고 요구했다. 기자와 편집자는 “이 이야기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며, 우리는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를 향한 비판은 매서웠고, 학계와 언론계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당시 엘리자베스 바솔렛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는 “사회에 거울만 세우겠다는 주장은 너무나 충격적이고 언어도단적”이라며 “단지 기사를 쓴다고 해서 도움이 필요한 아동을 도와야 하는 사회구성원의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 아이들의 인간적 삶보다 당신들 기사의 길이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냐”고 반문했다. 계속된 논란 속에도 LA타임스 측은 “취재 과정에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의 진짜 역할은 드러내는 것, 독자들이 고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비난은 끝나지 않았지만 이 보도는 그 자체로 대단한 변화를 이끌어냈다. 보도 직후 LA 아동학대 신고가 20~45% 증가했고, 법원이 아동복지국에 핫라인 개설을 명령했다.

KBS ‘시사기획 창’의 다큐멘터리 ‘탈북자 이은혜’편의 제작진은 2010년 중국 산악지역에서 조난 당한 탈북자를 구출한 일화로 유명하다. 중국에 머무르는 탈북자들의 참담한 인권실태를 취재하던 중이었다. 제3국으로 탈출을 계획하는 탈북자에게 취재진이 위성전화기를 건넨 게 계기였다. 바로 그 전화로 한 겨울 산 속에서 조난 당한 탈북자가 취재진에게 “살려달라”고 연락해 왔다. 제작진이 제3국과 현지 대사관에 사실을 알리고 현장에 가면서 결국 구조가 이뤄졌다. 탈북자들의 고충, 조난, 구출 상황을 담은 영상은 호평 받았지만 고민도 남겼다. 당시 한국기자협회 기자상 심사위원회는 “이념이 아닌 생존의 시각으로 접근했다”고 평가하면서도 “돌발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도 취재진이 취재원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디까지 개입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다”는 입장을 냈다.

2013년에는 남성연대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며 성재기 남성연대 대표가 예고 후 한강에 투신한 사건이 논란이 됐다. 언론은 그의 투신을 그대로 촬영했고, 그는 나중에 시신으로 발견됐다. 당시 ‘자살 방조’ 논란의 중심에 선 KBS는 공식 입장을 통해 “(투신 전 인명구조를 위해) 경찰과 수난구조대에 1차 구조신고를 했고, 뛰어내린 직후에도 수난구조대에 2차 구조신고를 했다”고 해명했으나 비판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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