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지·놀이터·상가 등 편리함 많지만 관리사무소 통해 公私문제 처리해
"얼마 이하로는 팔지 맙시다"집값 담합에 건축하자 공개 막고 임대 입주자들 차별 등 부작용
주택단지를 단지화하는 정책이 불씨
주택협동조합 등 대안적 개발도 단지화의 유혹에서 못 벗어나
1996년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했을 때 우리 집 아이들은 여덟 살, 일곱 살, 두 살이었다. 겨우 걷게 된 두 살 배기야 생활이 달라진 것이 거주지 탓은 아니겠지만 여덟 살과 일곱 살은 거주지를 바꾸면서 활동이 완전히 달라졌다. 눈만 뜨면 밖으로 나가 마당을 팠다.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멀리 고궁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텔레비전을 보거나 게임을 하는 시간이 확 줄었다. 겨울에도 여름에도 마찬가지였다. 실내에 머물면서 입버릇처럼 “심심해” “놀아줘”하던 것이 사라지고 몸을 써가며 알아서 즐겁게 놀았다.
이건 어린이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일까. 직장을 다니면서 집이 그저 잠자는 공간이기만 하는 어른들에게는 상관없는 일일까.
대한민국의 가장 대표적인 주거공간, 아파트. 면적으로는 2억8,913만평(60.6%)이라서 단독(1억40만평 21.0%) 다가구(4,289만평 8.9%) 다세대(3,055만평 6.9%) 연립(1,138만평 2.4%)을 다 합친 것보다 많다.(국토교통부 통계)
아파트는 한 채에 한 가구가 들어 살면서 가구별 독립성이 확보된다. 단독 다가구 다세대 연립주택에 비해 최근에 지어진 시설이 많아 깔끔하다. 공간 내 녹지가 많아 보기에 쾌적하다. 놀이터 어린이집 경로당 주민체육시설 모임공간이 단지 안에 자리잡아 또래사교를 즐기기도 좋다. 상가가 단지에 가까이 있어 장보기도 편하다. 관리사무소가 관리를 맡아주고 경비가 보안을 걸러줘서 복잡한 시비를 겪을 일이 드물다. 대신 관리비를 내야 하므로 비용이 더 든다.
일단 외형만 보면 편리함은 많고 불편은 적다. 그러나 저 편리함 속에 모든 문제가 들어있다. 인간사회에서 당연히 겪어야 하는 관계, 그 관계에 따른 시비를 단절함으로써 인간관계를 만드는 소통방식 자체를 잊는다. 아파트 층간소음으로 살인까지 일어난 사례에서 그 대상은 모두 윗집이나 아랫집, 가장 가까이 사는 ‘이웃’이다. 그런데 아파트에서는 가까이 산다는 것이 이웃이 되는 요건이 아니다. 사람끼리 부대끼는 문제를 늘 직접 해결하지 않고 경비와 관리사무소를 통해 간접적으로 처리해왔기 때문에 주민들은 나와 너가 아니라 나와 제3자였다. 이런 상황이 오래 누적되면서 생겨난 대화방법의 미숙함이 결국 직접 대화를 나눴을 때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겨우 층간소음이라는 문제로 이웃을 죽이게 할만큼의 극단적인 감정으로 치닫게 만든다. 모든 것은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기가 부리는 고용인을 통해서 이뤄진, 대등한 접촉을 경험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된 단점은 생각보다 크다.
나와 너의 관계는 없는 반면 수많은 ‘나’들은 비슷한 규모의 재산을 가진 동질성으로 그 동질성을 지키기 위한 집단이기주의에는 무섭게 뭉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집값을 지키기 위한 담합. ‘아파트를 얼마 이하로는 팔지 맙시다’라는 노골적인 공문이 아파트 단지에 붙는가 하면 아파트 가격을 떨어뜨릴 수 있는 주변 환경의 변화에는 상식을 벗어난 대응을 한다. 건축하자도 집값을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은 공개가 금지된다. 건축문제가 집값 때문에 개선이 안 된다. 7월초에는 토지주택공사가 미분양 아파트를 사들여 임대아파트로 분양하자 주민들이 임대 입주자들의 이사를 집단적으로 방해하는 일도 일어났다. 바로 옆에 자리잡은 임대 아파트 단지와 연결된 통로를 막아서 저소득층이 중산층 단지 내 길조차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주 흔하게 일어난다. 심지어는 서울 강서구 어느 학교에서는 같은 학교에 배정된 임대 아파트의 학생들과는 자녀들을 한 반에서 배우게 할 수 없다고 학부모들이 항의하는 바람에 민간분양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 학생들이 따로 반을 구성한 적도 있다. 재산규모에 따라 사람을, 심지어는 그 소득차이에는 아무 책임도 없는 자녀들까지 차별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 사고가 얼마나 저급한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행동이 버젓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아파트 탓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아파트 탓이라기보다는 아파트의 단지화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난 주에도 잠시 언급했듯이 건축가 박인석(명지대) 교수는 아파트 한국사회라는 책에서 아파트가 문제가 아니라 모든 주택지를 단지화하는 주택정책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단지 아파트가 단지가 가장 많아서 아파트의 문제로 비칠 뿐이라는 것이다.
아파트란 건축법에서 5층 이상인 공동주택을 말한다. 한 동 짜리부터 134개동 짜리(서울 가락시영아파트)까지 그 규모는 다양하다. 주택법상 형태가 아파트든 연립이든 단독주택이든 일정 규모 이상의 단지를 형성할 경우 거기에는 주민공동시설을 넣도록 되어 있다. 박 교수는 60, 70년대에 공영아파트를 단지로 형성하면서 단지개발의 편의성을 알게 된 정부가 결국에는 민간분양에도 단지화를 사실상 장려하면서 아파트 단지가 전국을 휩쓸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단지화가 되면 공공이 공급해야 할 공익시설을 민간이 떠맡는다. 규모는 커질수록 수익은 남는다. 단지마다 관리사무소를 하나씩 두도록 한 법 때문에 소규모 단지보다는 대규모 단지가 환영을 받는다. 관리비 부담이 줄기 때문이다. 단지는 철도?고속도로?자동차 전용도로, 폭 20미터 이상의 일반도로, 폭 8미터 이상의 도시계획예정도로 분리되지 않은 덩어리여야 하기 때문에 공용도로를 허용할 수 없는, 대규모 사유지로 단지가 구성된다. 인근 임대아파트 주민의 출입을 끊는 것은 그래서 가능하다.
일단 단지가 형성되면 입주민의 동선은 지극히 단순해진다. 외부에서 단지 안으로 들어와 자기집으로 들어가는 단 하나의 길만이 생긴다. 그가 지나가며 보는 풍경, 만나는 일상도 지극히 단조롭다. 이웃과 접할 기회는 희귀하고 아파트 동 사이를 지날 뿐이다. 분양실적을 올리기 위해 원래는 외부공간이 되어야 할 베란다까지 모두 개인공간으로 막아버리게 허용함으로써 개별적인 가가호호란 사라졌다. 단지가 아니라면 고만고만한 소필지들 사이로 숱한 골목이 있고 소필지마다 다른 집이 있고 여러 종류의 가게와 공공시설이 적절히 어우려져서 지나다니는 사람은 매일 다른 풍경, 다른 상황, 다른 사람들과 스치며 각기 다른 매일을 체험했을 것이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일상이다. 그런데 그걸 다 끊어버리는 것이 단지다. 요즘 아파트에서 타운하우스나 단독주택으로 취향이 바뀌는 것이 주택문화의 개선인양 광고하지만 이것 역시 단지로 형성되면 똑 같은 문제를 만들어낸다”고 박 교수는 지적한다. 개인이 직접 책임지지 않는 집단주의, 금전적 이해관계로 뭉치는 배타주의 측면에서 똑같을 수 있다는 말이다.
7월 중순 서울 은평구청 회의실을 빌려 열리는 어느 주택협동조합의 설명회를 들어보았다. 주택협동조합(쿱Coop이라는 표현을 더 즐겨쓴다)은 조합원끼리 단독주택을 함께 짓는 것으로 현재의 주택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좋은 평가를 받아왔다. 과거의 주택조합이 시공사 보증으로 은행대출을 받아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면 이 주택조합은 자기가 책임지는 돈으로 자기 집을 건설하는 것이 다르다. 그러나 막상 들어본 가입 권유 방식은 아파트 단지 경우와 매우 비슷했다. 땅값이 싼 곳에 공동으로 투자해서 단독주택단지를 만들고 그 안에 공동시설을 만들면 그들만의 더 좋은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실상 이런 단독주택 단지라면 서울 강남이나 성북동, 경기도 용인의 땅값 비싼 곳에서 오래 전부터 몇 군데가 형성되어 있는데 역시 외부와는 소통을 거절하는 공간이다. 박 교수는 “공동의 이익에만 결사적인 이런 동질적 소집단의 단지가 전국에 많아질수록 바람직한 공동체 의식은 파괴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심지어 “주거하면서 생기는 문제를 직접 해결해야 하는 소필지와 달리 단지는 관리사무소가 지방정부와의 충돌을 모두 대행하면서 입주민들은 모든 것을 개인책임으로 돌리고 정치의식도 낮아진다”고 분석했다.
그러면 아파트를 단지가 아니라 개별적인 가가호호로 만들면 역으로 이 같은 퇴행을 막을 수 있을까. 서울 강남구 세곡동 3단지는 일본 건축가 야마모토 리켄이 지은 임대아파트이다. 이곳은 중간에 고층이 끼어있지만 1~5층은 베란다를 완전 개방공간으로 만들고 복도를 마주보게 해서 아파트 한 채마다 개성이 살아나고 주민들간의 면대면 접촉이 늘어나게 했다. 1층은 밖에서 바로 집집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가가호호의 특징이 더 살아났다. 밖에다 빨래를 너는 주민을 보니 진짜 사람냄새 나는 공간이구나 감탄이 일었다.
그러나 빨래를 널던 주민 김현정(36)씨는 불만이 많았다. “공간이 뚫려 있고 자연과 함께 하니까 다른 아파트에 살 때처럼 갇혀있다는 느낌은 안 드는 건 좋아요. 그런데 베란다로 눈과 비가 들이쳐서 겨울에는 얼어요. 현관문이 유리라서 겨울에 결로현상도 생기고요. 이 집은 북향이라 해가 덜 들어와요. 집집마다 속옷 너는 것도 다 보이는 건 별로예요.”주아무개(46)씨는 아예 이리 저리 끌고 다니며 건축하자를 고발했다. “이거 봐요. 테이프 하나만 붙였다 뗐는데 페인트가 전부 들고 일어났어요. 시멘트도 다 떨어져서 저기 저기 다 새로 발랐잖아요. 타일도 새로 바른 데 많아요. 작년 겨울에 준공한 집이 이게 말이 됩니까. 마감이 엉망이에요.”반면 송기숙(67)씨는 “단열이 잘되어서 겨울에도 뜨뜻하게 지내지만 연료비가 4만원 밖에 안 나와요. 5층 옥상에 있는 텃밭 농사 지어서 주민들끼리 나눠먹고. 진짜 좋아요.”라고 칭찬했다. 모두들 자기가 겪은 진실을 말한다. 확실한 것은 아파트 주민으로 건축하자를 기자한테 저렇게 적극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는 사실이다. 일부가 북향이고 시공의 질이 높지 않다는 점은 유감이지만 베란다에 눈비가 들이치고 겨울에 유리문에 결로현상이 생기는 것은 단독주택에는 흔한 일이다.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파트도 설계와 운용에 따라 집단주의에 매몰되지 않은 독립된 개인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오히려 그들의 불평으로 확실해 보였다.
서화숙 선임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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