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작가 홍승혜 개인전 '회상'
기존 작품 형태와 소재를 바꿔 신작으로 재구성한 회고전
"시간 돌아보며 내일을 위한 출발점"
픽셀(화소)은 컴퓨터가 재생하는 이미지의 최소 단위다. 모니터로 보는 모든 이미지는 픽셀이라고 부르는 정사각형의 작은 점으로 이뤄져 있다.
홍승혜(55)는 픽셀로 공간을 ‘연주’하는 미술작가다. 그가 1997년부터 해 온 ‘유기적 기하학’ 시리즈는 포토샵을 이용해 픽셀을 자르고 배열하고 조합해서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사각형 격자인 픽셀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건물이나 창문, 계단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이리저리 돌리거나 한 방향으로 밀어내 3차원 입체로 증식시키기도 한다. 번식하고 진화하는 그의 픽셀은 살아서 움직인다는 점에서 유기적이다.
서울 소격동의 국제갤러리 2관에서 열리고 있는 홍승혜 개인전 ‘회상’은 유기적 기하학의 과거 행적을 돌아보는 전시다. 예전 작품들을 형태와 소재를 바꾸고 흑과 백, 회색의 무채색 톤으로 다시 제작해 선보이고 있다. 신작으로 구성한 회고전인 셈이다. 그동안 해온 다양한 시도들, 즉 시공간의 레이어를 넘고(‘레이어를 넘어’), 분절과 결합을 거듭하고(‘파편’), 그리드의 안과 밖을 넘나들고(‘온 앤 오프’), 음악적 질서를 수용하고(‘음악의 헌정’), 끊임없이 프레임을 갱신해 온(‘프레임의 모든 것’) 작업들을 보여준다. 서랍 모양의 알루미늄 패널 작품을 실제 가구로 제작하고, 실크스크린 작업을 잉크젯 프린트로 바꾸고, 나무 프레임의 설치조각을 철제 구조물로 재현하는 등 기존 작업을 변주했다.
이 작품들이 지닌 유기적 질서는 음악을 연상시킨다. 사실 ‘보는’ 미술에서 음악을 ‘듣는’ 것은 낯설지 않다. 음악과 미술의 오랜 친연성은 ‘화려한 색채의 음악’이나 ‘리드미컬한 화면’ 같은 흔한 표현들에 잘 나타난다. 그래서일까. 유기적 기하학의 초기 평면 작업은 존 케이지, 얼 브라운 등 현대음악의 실험적 작곡가들이 만들어낸 도형악보처럼 보인다. 도형악보가 음악을 청각에서 시각으로 확장시켰듯이 홍승혜의 유기적 기하학은 시각에서 청각으로 뻗어가는 미술을 보여준다.
2차원 평면에서 출발한 픽셀이 번식하고 진화하며 평면과 입체를 넘나드는 모습은 시간의 춤이기도 하다. 시간이라는 또 다른 차원이 개입해서 일어나는 변용을 시각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2층 전시장에 설치한 플래시 애니메이션 ‘6성 리체르카레’는 도형으로 안무한 시간의 춤을 실감하게 만든다. 컴컴한 방에 틀어놓은 6개의 영상에서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픽셀들이 바흐 음악에 맞춰서 움직이며 춤을 추고 있다. 각 화면의 영상과 음악이 서로 달라 불협화음처럼 충돌하면서도 묘한 조화를 이룬다. 천천히 떨어지다가 빠르게 흩어지기도 하고 막대 모양으로 뭉쳐서 회전하기도 하는 픽셀들의 우아한 춤을 한참 보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작가는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을 그래픽 영상으로 재현해 그때그때의 기분을 표현하는 ‘센티멘탈’ 시리즈를 해 왔다. ‘6성 리체르카레’는 전에 선보였던 센티멘털 시리즈를 흑백으로 전환해 한데 묶은 것이다. 2009년 작 ‘음악의 헌정’은 이 곡의 원전인 바흐의 모음곡이다.
신작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이번 전시를 작가는 ‘시간을 돌아봄으로써 새로운 진화로 나가는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돌이켜 보면 나는 늘 돌이켜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과거는 주어졌고 미래는 한없이 불확실하다. 결국 이것은 시간의 흐름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시간에 의해 변화하는 모든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변한다. 그는 “살아 움직이는 도형은 나의 분신이나 마찬가지”라며 “기하학적 도형에 빗대 시간의 흐름과 변화하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작품들”이라고 설명한다. 과거의 회상이지만 반복이 아닌 이번 전시는 그의 유기적 기하학이 진화를 거듭할 것임을 알려준다. 이 네버엔딩 스토리의 다음 작업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해진다.
전시는 8월 17일까지 한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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