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 대표 참여지식인
헌법 9조 지지하는 9조 모임 만들어
평화 희구하며 49세 낸 자서전
40쇄 이상 출간되며 고전 반열 올라
‘9조모임’은 평화헌법으로 통하는 일본 헌법 9조를 지지하는 일본 지식인 그룹이다. 노벨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 의학 박사이자 문학평론가, 저술가인 가토 슈이치가 만들어 평화 이상 실현에 앞장섰다. 헌법 9조야말로 “일본인이 이어가고 있는 정신의 모험”이라 평했던 모임의 산파 가토 슈이치의 자서전 ‘양의 노래’가 국내 번역 출간됐다.
2008년 89세의 나이로 작고한 그는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참여지식인이다. 양은 양띠 해에 태어난 저자 자신을 뜻하며 한국어판에는 1966~67년 아사히저널에 연재된 ‘양의 노래’와 1967년 연재한 ‘(속)양의 노래’ 외에 이후 30년을 회고한 ‘양의 노래 그 후’를 담았다.
책은 서양 물건이 즐비하게 진열된 집에서 “서양물이 잔뜩 든” 외할아버지나 성공 욕심 없이 한가로이 시부야에서 환자를 돌보는 의사 아버지를 바라보는 어린 소년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허약한 부잣집 도련님’의 전형에 가까웠던 그는 자신이 목도한 1920~30년대 일본의 오묘한 풍경을 유려한 언어로 회고한다. 바깥으로는 제국주의 전선을 확대해가면서 도시에선 번역 문학과 독일 낭만파 음악이 흐르던 풍경은 그에겐 “일본의 전통 문화를 망각하기에 충분했지만 서양 문화를 이해하기에는 불충분한” 우스꽝스러운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학교는 소총 조작법, 현역 군인의 사열 및 시찰, 국민정신총동원의 구호 등의 물결로 일렁였고, 군국주의에 일찌감치 “넌덜머리가 난” 그는 자주 아버지의 서재에 틀어박혔다. “나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감동했으며 또 비탈길 아래로 굴러 내려가기 시작한 자동차처럼 끝도 없이 미쳐 돌아가는 사회를 곁에서 바라보며, 결국엔 어떤 파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192쪽)
안팎에서 신성시되던 군국주의를 부정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문장(“군인은 어린아이를 닮았다”)에 매료된 그는 도쿄대, 파리대에서 의학을 전공하면서도 꾸준히 문학을 탐닉했고 이 경험은 그를 평론가로, 칼럼니스트로, 나아가 반전운동가로 살아가게 했다.
전투기로 뒤덮인 도쿄의 하늘, 사태를 왜곡한 일본 정부의 선전선동, 미일 원자폭탄의학조사단의 일원으로 방문한 히로시마의 풍경 등을 담담하게 그려낸 그의 기록에는 폐부를 찌르는 문장들이 적잖이 숨어있다. “우린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하는 국민은 스스로 훨씬 더 자유롭다고 믿었을 때, 훨씬 더 자유롭지 못했다”(128쪽), “어쩌면 대개의 열렬한 애국주의자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 대신 국가를 사랑하는 것이다”(132쪽), “일본의 천황제 관료지배체제는 모든 반전운동의 가능성을 압살했다. 일본은 항복 때까지 스스로 방향을 전환할 능력이 없었다”(513쪽) 등이다.
시종일관 이성의 회복과 평화를 희구했던 그는 만 49세에 다소 이른 자서전을 내놓으며 “현대 일본인의 평균치에 가까운” 자신을 사례로 삼아 평균적 일본인을 성장시킨 조건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적었다. 과연 이 기록은 패전 후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 소모적 전쟁을 치렀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갈구하며 방황하던 일본 지성계에 제시된 하나의 위로였고, 1968년 처음 선보인 이후 40쇄 이상 출간되며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일본 독자들이 반세기 가깝게 이 책에 열광하는 동안, 아직도 그의 노래에서 전쟁의 무상함을 읽어내지 못한 이들이 남은 까닭일까. 남은 그의 동료들은 여전히 군국주의의 잔재 혹은 신군국주의의 부활을 막기 위해 힘에 부친 싸움을 하고 있다. 반전을 갈구한 그의 생생한 육성과 ‘전쟁 가능 국가’로 성큼 다가선 일본 국회 사이, 그 헤아릴 수 없는 간극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과학자로서의 인식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가치 문제다. 매일 폭격 아래 아이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용인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논의의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라는 뜻이다.”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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