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설움의 땅을 훨훨 지나서 /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고정희 ‘상한 영혼을 위하여’ 中 )
마음을 열어 주위를 둘러보면 함께 슬퍼하며 위로할 상한 영혼들이 가득합니다. 극빈의 고통, 실직의 불안, 전쟁의 공포, 환경 재앙, 영적 공황…. 스스로 극복하고 자기 힘으로 일어설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엔 더 많습니다. 물론, 때로는 강한 이들조차 넘어지고, 지혜로운 사람도 실족합니다. 신심(信心)이 두터운 사람도 절망의 벽 앞에서 희망의 끈을 탁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생의 길 위에 숱한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으니까요. 세상 누구도 ‘나는 타인의 위로와 격려 따윈 필요치 않아!’라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을 ‘사이(間)’의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서로 위로받고 위로를 베풀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 아닐까요.”
- ‘시 읽어주는 예수’(고진하 지음, 비체, 71쪽)
‘시 읽어주는 예수’의 저자 고진하 시인은 약 30여 년을 시인이자 목사로 살아온 영혼의 위로자다. 그는 고인이 된 고정희 시인을 떠올리며 이 시를 소개한다. 한 가을 캠퍼스에서 만난 그녀는 멀리서 온 아우(고진하 시인)를 빈손으로 보낼 수 없다며 손수건에 은행잎을 차곡차곡 담아 선물했다고 한다. 심신이 궁핍한 시절, 그게 그렇게 큰 위로가 됐다.
최악의 파리 테러, 번지는 위협과 증오 등 안팎에서 비보가 끊이지 않는 나날들. 세계에 절실한 건 어쩌면 한 줌 은행잎 같은 소박한 위로일 터. 그로 인해 이 “절망의 벽” 앞에서 누구도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지 않는 것일 테다. 고인은 ‘상한 영혼’들에게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고”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아파도 고통에 “살 맞대고 가자”고 썼다. 그녀에게 속는 셈 치고, 내일도 희망을 앓아볼까 한다.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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