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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8.18 14:42
수정 : 2015.08.19 04:48

[이정모 칼럼] 설화에서 과학으로

등록 : 2015.08.18 14:42
수정 : 2015.08.19 04:48

설화에서 과학으로

옛날 옛적,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았다. 부부는 바위를 타고 신라를 떠나 일본의 어떤 섬에 도착해서 왕과 왕비가 되었다.

바로 그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는 사건이 일어났다. 고려시대에 쓰인 태양신 설화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바위를 타고 바다를 건넌다고? 아마 바위처럼 생긴 어떤 동물이었을 것이다. 설화 연구가들은 귀신고래가 그 주인공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실제로 귀신고래는 몸이 회색으로 얼룩져 있고 등에 따개비와 굴이 잔뜩 붙어 있어서 바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설화에 등장할 정도면 귀신고래가 동해안에 얼마나 흔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비록 1977년 이후에는 동해안에서 단 한 마리도 관찰되지 않지만 말이다.

귀신고래.

귀신고래라는 이름은 사나운 포식자인 범고래 때문에 생겼다. 귀신고래는 범고래 떼의 공격을 피해 수심이 얕은 해안가의 암초 사이로 다닌다. 보통 1분에 2~3번씩 호흡을 하고 길어야 3~5분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숨을 오래 참지 못한다. 암초 사이에서 자맥질을 하던 해녀들은 바위틈에 자주 머리를 빼꼼히 내밀고 숨을 쉬다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커다란 고래에 기겁하곤 했다. 덕분에 귀신고래라는 이름이 붙었다.

서양에서도 좋은 이름을 얻지는 못했다. 귀신고래를 영어권에서는 ‘악마 물고기’라고 불렀다. 바다 밑바닥에서 무척추동물을 먹지만 숨을 오래 참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사냥감인 귀신고래는 포경선에게는 아주 사나운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귀신고래에게 ‘회색고래’라는 공정한 이름을 붙여준 사람은 미국 뉴욕 자연사박물관의 로이 채프먼 앤드류스다. 조선에 와서 2년간 악마 물고기를 연구한 후 귀국해 1914년 논문을 썼는데 이때 ‘한국계 회색고래’라고 불렀다.

고생물학자들은 앤드류스라는 이름을 들으면 곧장 영화배우 해리슨 포드를 떠올린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서 해리슨 포드가 연기했던 인디아나 존스 교수의 실제 모델이 바로 앤드류스다. 영화에서는 고고학자로 나오지만 그는 고생물학자였다. 앤드류스는 1923년 미국자연사박물관 팀을 이끌고 몽골 고비사막에서 세계 최초로 과학적 탐사를 했다. 이때 공룡 화석을 발굴하면서 고비사막이 공룡의 낙원으로 전세계에 알려졌다.

소련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소련 역시 1940년대에 대규모 탐사대를 꾸려서 티라노사우루스의 사촌뻘인 타르보사우루스를 발굴하는 데 성공했다. 영화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에 등장하는 바로 그 공룡이다. 물론 한반도에 타르보사우루스가 살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타르보사우루스는 ‘놀라게 하는 도마뱀’이란 뜻이다.

꾸준함을 이길 그 어떤 재주도 없다. 고비사막에서 가장 큰 업적을 이룬 탐사대는 1970년대의 폴란드 공룡 탐사대였다. 폴란드 탐사대는 꾸준한 탐사를 통해 다양한 공룡의 완벽한 화석을 발굴하여 전세계적인 이목을 끌었다.

영화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의 한 장면. 소련 탐사대는 이 공룡을 타르보사우루스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여기서도 우리는 전혀 초라하지 않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지질박물관장인 이융남 박사와 이항재 연구원은 2006년부터 2011년까지 5년간 몽골 고비사막을 탐사했다. 탐사 성과물 가운데는 데이노케이루스 표본도 있다. 1965년 고비사막에서 양 앞발 화석이 발견된 후 새로운 표본이 발견되지 않아 베일에 싸여 있던 공룡이다. 이융남 박사 연구팀의 탐사 성과로 50여년 동안 숨겨져 있던 데이노케이루스의 정체가 밝혀져 지난해 ‘네이처’지에 실리면서 우리나라가 공룡 연구의 중요한 포스트로 주목 받고 있다.

지난 주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지질박물관 연구팀은 고비사막을 탐사했다. ‘고비 공룡 지원단’이라는 이름으로 올해로 세 번째 진행된 이 탐사는 한국ㆍ일본ㆍ몽골 연구팀이 함께 하는데, 한국과 일본의 경우 공룡을 사랑하는 아마추어 애호가들이 함께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일본 탐사대는 대부분 노련하다. 직장에서 은퇴한 후 10여 년씩 탐사를 계속하는 경우가 많다. 한 일본 대원은 자연사박물관의 명예관장인데 일본 탐사대장의 대학시절 교수였다. 이제 제자의 지도를 받으며 그의 연구를 지원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탐사대에는 20, 30대의 젊은이들이 많다. 현생 동물의 뼈와 공룡의 화석을 구분도 못하는 채로 고비사막에 도착했지만 금방 익숙해지고 과학자들보다 오히려 화석을 더 잘 찾기도 한다. 공룡에 대한 애정이 넘치기 때문이다. 올해 탐사에서도 3국 공동연구팀은 많은 화석을 발굴했다. 몽골 고생물학 및 지질학 연구소의 처리를 거쳐 과학적인 연구를 하게 된다.

나는 지질박물관이 주관하는 이 탐사가 과학관과 자연사박물관의 모범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과학관과 자연사박물관의 역할은 전시 휴게공간에 그친다. 시민들은 과학관과 자연사박물관에 와서 멋진 전시물을 보고 사진을 찍고 과학에 대한 경이감을 가지고 돌아간다.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게 된 아이들도 있지만 ‘와! 과학은 정말 대단한 거야. 역시 나는 할 수 없을 것 같아’란 생각을 하는 시민들도 있다. 몇몇 과학관과 자연사박물관은 전시휴게공간을 넘어 교육기관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다.

한 단계 더 나아가 과학관과 자연사박물관을 시민이 직접 과학을 하는 곳으로 만들면 어떨까. 과학관에 와서 보고 감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실험과 공작을 하고, 자연사박물관에 와서 화석과 박제를 보고 배우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고생물학자들과 함께 탐사를 하는 것이다. 과학의 발전은 구경과 학습이 아니라 실험과 관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젠 더 이상 동해안에 살았던 귀신고래에게 회색고래라는 이름을 붙이거나 한반도에 살았을지도 모르는 공룡에게 타르보사우루스라는 이름을 붙이는 일을 먼 나라 사람들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 우리도 설화에 그치지 말고 과학을 해야 한다. 우리도 인디아나 존스가 될 수 있다.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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