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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삶이 있는 풍경] 어른소녀가 찾아왔다

입력
2016.09.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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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살 소녀가 찾아왔다.

추석 연휴를 며칠 앞둔 엊그제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온 도심을 채운 날이었다. 소녀는 조용히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나와 눈길을 마주하자마자 발그레 얼굴빛부터 붉혔다. 오후 햇살보다 더 따사로운 기운이 고스란히 내게로 왔다. 지난겨울 이후 오랜만에 만난 소녀는 그사이에 부쩍 성숙해 있었다. 공부하느라 지쳐 푸석푸석했던 얼굴은 어깨까지 닿는 양 갈래 머리칼 사이로 맑은 빛을 품고 있었고 진홍빛 티셔츠를 받친 검은색 짧은 치마의 조화로운 맵시는 갓 성년을 앞둔 소녀의 티를 조금씩 털어내고 있었다. 내 앞에서 부끄럼도 없이 요강에 ‘일’을 보고는 바지춤을 끌어올리던 옛 기억이 떠오른 나는 대견한 마음에 웃음으로 화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녀와의 인연은 아주 오래되었다. 강원 화천군의 깊은 산골짜기 외딴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 겨우 서너 살이나 되었을까. 수줍음 반 호기심 반 가득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빨던 모습도 여전히 눈에 선하다. 소녀의 이름은 ‘원목’이. 자연 귀의를 실천하며 대안적 삶을 이루려는 부모님과 네 명의 오빠를 둔 원목이는 그곳의 사방 가득한 나무숲을 병풍 삼아 태어났고 산새들을 비롯한 온갖 산짐승들을 벗 삼아 성장했다. 그런 탓인지 어릴 때부터 사소해 보이는 무엇 하나 생명을 품은 것이라 하면 그 소중함의 의미에 아래위를 두지 않았다. 벌레 하나 함부로 밟지 않는 것은 물론 자연이 품은 모든 사물을 더없이 아낄 줄 아는 아이였다. 이후 세월이 흐르는 내내 지속적인 만남이 이어지면서 조카와 삼촌의 관계인 우리는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소설가를 꿈꾸며 춘천의 한 대학교 인문학부 신입생이 된 원목이는 언젠가 자기 이름으로 첫 소설이 나오면 제일 먼저 선물하고 싶다며 ‘삼촌’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이어 성년으로서 맞이하는 삶에 대한 단상들을 소박하게 꺼내놓기도 했다. 꿈을 품은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으냐는 질문을 던졌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원목이는 발그레한 얼굴빛을 거두고 짐짓 진중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인간의 생명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글로 풀어내려 한다며 특히 ‘세월호’ 사태가 자신의 삶의 방향성을 정하는데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고 했다. 귀한 생명이 어이없이 숨을 잃은 것도 가슴 아픈데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조차 훼손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얘기다. 물끄러미 얘기를 듣고 있던 나는 아까부터 눈에 띈 원목이의 가방에 매달린 노란 리본과 왼쪽 팔목의 노란 팔찌 그리고 휴대폰에 붙여진 노란 리본 스티커를 일일이 주목하면서 가슴이 뿌듯해졌다.

“저희 또래잖아요. 그때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던 게 너무 미안했어요. 이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으니 가만히 있지 않으려고요.”

원목이는 친구들과 진도군 동거차도까지 도보 행진을 한 뒤 침몰현장을 바라보다가 썼다는 짧은 글귀를 읽어주었다.

“진실호를 타고 / 진실을 찾으러 바다로 간다 / 검은 바다가 소리친다 / 돌아와 돌아와 돌아오렴 / … … / 머나먼 수평선으로 날아가지 않게 / 돌아와 돌아와 돌아와 주렴”

검은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이 ‘어른소녀’의 얼굴을 가만히 상상해 보았다. 가을 햇살보다 넉넉하고도 따사로운 얼굴이었다. 그리고 진도 앞 바다에서 삶을 멈춘 세월호의 원목이 또래 친구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 바라는 마음이 일렁거렸다. 일상의 분주함을 방패 삼아 제 살길만 모색하고 있지나 않은지 은근 부끄러워진 탓이다. 그럼에도 기분이 달달해지는 게 마치 선물이라도 받은 양 그 느낌이 상큼했다.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아 행동으로 실천 중인 원목이의 눈빛이 내 무뎌진 일상들을 돌아보게 한 것일까. 성큼 다가온 가을이 한결 반갑기만 하다.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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