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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으로 바위 치기이지만… ‘다윗의 싸움’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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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으로 바위 치기이지만… ‘다윗의 싸움’은 계속된다

입력
2017.07.1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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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참여연대 윤종훈씨

“삼성 일가 변칙증여 세금 물려라”

첫 1인 시위로 기대 이상 성과

“공무원들 잘 안들어 주지만

“기억해 준 시민들 덕에 용기”

사회적 약자들 최후의 보루로

시민 상당수 “거부감 못 느꼈다”

“약자 위한 평화로운 의사 표현

철저히 보장돼야” 목소리

지난달 한 시민이 서울시청 앞에서 경전철 신림선 노선 변경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지난달 한 시민이 서울시청 앞에서 경전철 신림선 노선 변경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집중호우가 쏟아진 8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분수대 앞. 한 손에 우산, 다른 손엔 각자 사정을 적은 피켓을 든 1인 시위자 예닐곱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는 이들은 “지나가던 대통령이 혹시라도 한 번 볼까 하는 마음에 이곳을 찾았다”고 했다.

피켓에는 몇 문장으로 줄인 단순한 구호가 적혀 있지만, 이곳을 찾는 이유는 구구절절 다양하다. 수억 원대 학교자금을 횡령한 한 대학교수를 거론하며 검찰 수사를 촉구한다는 권일훈(48)씨는 “사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억울함을 알릴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라 여겨 왔다”고 했다. 처음 이곳에 온 게 2015년, 벌써 3년이 지났고 대통령도 바뀌었지만 권씨는 ‘주장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떠날 생각은 없다.’ 기자에게 사연을 쏟아내는 그 순간에도 눈길은 청와대를 향해 있었다. 부당한 지방자치단체 행정 조치를 취소해 달라는 조명자(56)씨도, 대형병원 의료 과실로 뇌출혈을 당했다는 설수영(48)씨도 모두 권씨와 그리 멀리 않은 곳에서 각자 사연을 털어놓고 있었다. “낙수로 바위 한 번 뚫어보겠다”는 심정으로 말이다.

지금은 너무나 대중화해 정부 부처나 대기업 등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1인 시위가 어느덧 17세 ‘청년’ 시위 문화가 됐다. 2000년 12월 서울 종로타워 빌딩 앞에서 국세청을 상대로 “삼성그룹 이건희 일가 변칙 증여에 세금을 물리라”며 윤종훈(67) 당시 참여연대 조세개혁 팀장이 시작한 게 현재 1인 시위의 첫발이다.

윤씨는 10일 당시를 회상하며 “1인 시위는 그때 그럴 수밖에 없는 궁여지책이었다”고 말했다.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집시법)에 대사관 반경 100m 이내 집회 금지돼 있는데, 국세청이 임대해 들어간 종로타워에 하필 온두라스 대사관이 있었다. 머리를 굴리다 보니 ‘2인 이상 모여야 집회로 규정한다‘는 법의 허점이 보였다. 내친 김에 혼자서 피켓을 들고 침묵을 상징하는 마스크를 쓴 채 국세청 앞에 나섰던 그의 모습은 지금 우리가 흔히 보고 있는 1인 시위 그대로였다.

윤씨는 “당시 안정남 국세청장이 정문에 선 나를 보고 깜짝 놀라 뒷문으로 돌아가던 모습이 언론에 나오면서 여론 반응이 폭발적이었다”고 했다. 실제 국세청은 1인 시위 시작 78일 만이던 이듬해 2월 삼성전자에 과세(510억원)를 했다. 첫 출발이 ‘대성공‘이었던 셈이다.

이후 17년간 힘과 권력, 돈을 가진 곳 앞으로 1인 시위자들이 몰려들었다. “개그 프로그램을 폐지하지 말아달라”는 개그맨 지망생부터 “축구계 비리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축구심판까지 사연도, 목적도 가지가지. 현재 1인 시위자들이 오매불망 바라보는 문재인 대통령도 불과 7년 전인 2010년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조현오 당시 경찰청장 소환조사를 촉구하는 피켓을 홀로 든 적이 있다.

모든 1인 시위자들이 윤씨처럼 성공한 건 아니다. 그보단 여전한 무관심과 무력함에 쓰린 마음을 다독이면서 하루를 마감하고,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최근 몇 달째 서울시청 앞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김모(59)씨는 “첫날부터 지금까지 1인 시위 효과에 대해 의문부호를 지우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공사가 진행 중인 경전철 신림선 일부 구간을 직선화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매일같이 이곳을 찾고 있지만, 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수많은 공무원 중 단 1명도 없다고 했다. “앞으로도 ‘공허한 외침’일 것”이라고 그는 푸념했다.

김씨 걱정은 현실에 가깝다. 김씨의 1인 시위 현장과 불과 50m 남짓 떨어진 곳에서, 김씨 앞을 지나친 시민 100명에게 “방금 지나쳐 온 시위자를 기억하느냐”고 묻자, 절반이 넘는 시민(51명)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시위자를 기억한 49명 중 무려 44명은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1인 시위자와 시위 내용을 모두 기억하는 이는 100명 중 고작 5명뿐이었다. 결과를 접한 김씨 얼굴엔 복잡한 심경이 묻어났지만, 그는 이내 “우리를 기억해준 49명의 시민, 외침까지 기억해 준 시민 5명에게 고맙다”고 했다.

사회운동가들은 “1인 시위는 평화롭고, 합법적이며, 가장 적은 비용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수단”이라는데 공감한다. 시민들 생각도 비슷하다. 1인 시위 현장에서 만난 시민 상당수는 “(1인 시위 때문에) 불편을 느낀 적이 없었다”면서 “보편적인 1인 시위엔 누구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앞으로도 존재하고 진화할 수 밖에 없는 의사표현 방식이 될 것”이라며 “폭력이 없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약자를 위한 수단인 만큼 1인 시위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할 수 있도록 철저히 보장돼야 한다”고 전했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17년이란 긴 세월 1인 시위 참가 사연은 다양했다. 왼쪽부터 2006년 스크린쿼터 축소에 항의하는 영화배우 박중훈씨, 2010년 조현오 전 경찰청장 소환조사를 요구하는 문재인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 2012년 반값등록금 실현을 촉구하는 경희대 신입생 임상윤군, 2012년 수사 축소 혐의를 받는 검사에게 경찰 소환에 응하라는 당시 경찰청 소속 이지은 경감. 한국일보 자료 사진
17년이란 긴 세월 1인 시위 참가 사연은 다양했다. 왼쪽부터 2006년 스크린쿼터 축소에 항의하는 영화배우 박중훈씨, 2010년 조현오 전 경찰청장 소환조사를 요구하는 문재인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 2012년 반값등록금 실현을 촉구하는 경희대 신입생 임상윤군, 2012년 수사 축소 혐의를 받는 검사에게 경찰 소환에 응하라는 당시 경찰청 소속 이지은 경감. 한국일보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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