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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표 “K리그, 승부조작하기 좋은 리그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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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표 “K리그, 승부조작하기 좋은 리그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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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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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다. 세밑 끝자락인 2016년 12월 30일 이영표(39) KBS 축구해설위원을 만났다. 정유년 새해 한국 축구를 말하기에 앞서 2016년을 되짚어보는 과정이 필요했고, 평소 폭 넓은 사고를 바탕으로 ‘똑 부러지게’ 의견을 내는 그가 적임자라 판단했다. 서울 광진구의 한 식당에서 시작한 인터뷰는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가며 계속됐다.

대표팀이 첫 번째 주제였다. 울리 슈틸리케(62ㆍ독일)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지난해 2018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전에서 크게 휘청댔다. 10경기 중 5경기를 치른 현재 3승1무1패(승점 10)로 A조 2위다. 월드컵 본선 직행 출전권이 걸린 조 2위는 가까스로 사수했지만 기대 이하의 경기력과 슈틸리케 감독의 ‘설화(舌禍)’로 적지 않은 실망을 안겼다.

이영표 KBS 축구해설위원이 '2016년 한국 축구를 말하다'는 주제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 위원은 국가대표팀의 부진과 K리그 전북 현대의 심판 매수 사건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 가감 없이 쓴소리를 던졌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이영표 KBS 축구해설위원이 '2016년 한국 축구를 말하다'는 주제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 위원은 국가대표팀의 부진과 K리그 전북 현대의 심판 매수 사건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 가감 없이 쓴소리를 던졌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갓틸리케’라 칭송 받던 슈틸리케 감독이 지금은 ‘슈팅영개(2016년 10월 이란 원정에서 유효슈팅이 0개에 그친 걸 비꼰 별명)’로 불리고 있다.

“슈틸리케 감독이 단기적으로 선수들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대처하는 것은 좋았다. 부임 초기 백지나 마찬가지에서 시작해 꾸준히 좋은 분위기를 유지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일을 진행시켰는지 제시하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장점은 발전시키고 단점은 만회해야 팀이 강해지는데 이기고 지고를 떠나 전체 조직력이나 분위기가 잡혀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흔들렸다.”

-약 팀을 상대로 승승장구하다가 밑천이 드러났다는 평가도 있다.

“그렇게까지 비난할 필요는 없다. 드러난 현상만 보고 이야기하자. 약 팀과 경기에서는 선수들의 컨디션을 잘 유지하고 자신감만 부여하면 된다. 또 선수를 많이 바꾸면서 경쟁을 유발한 것도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최종예선에서 강 팀을 상대하려면 반드시 조직력이 필요하다. 선수간의 경쟁은 팀이 강해지는 하나의 과정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닌데 끊임없이 선수를 바꾸면서 조직력이 헐거워졌고 대량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다. 슈틸리케 감독의 장기적인 팀 운영이 조금은 실망스럽고 의문을 가질 만하다.”

부임 초기 승승장구하며 '갓틸리케'라 평가받던 울리 슈틸리케(오른쪽) 대표팀 감독은 2016년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기대 이하의 경기력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사진은 훈련 도중 생각에 잠긴 슈틸리케 감독. 대한축구협회 제공
부임 초기 승승장구하며 '갓틸리케'라 평가받던 울리 슈틸리케(오른쪽) 대표팀 감독은 2016년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기대 이하의 경기력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사진은 훈련 도중 생각에 잠긴 슈틸리케 감독. 대한축구협회 제공

-러시아 월드컵 본선은 갈 수 있을 거라 보나. 또 본선에 간다 해도 경쟁력이 있겠냐는 우려도 있다.

“굳이 예상을 하자면 어렵게 아주 어렵게 살얼음판을 걷더라도 본선은 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하면 본선에서는 정말 힘들 거다. (본선을 대비해 사령탑을 교체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그것만이 해답은 아니다. 더 좋은 감독이 온다는 보장도 없다. 슈틸리케 감독에게 ‘그만둬’라고 말할 게 아니라 ‘이런 점들이 부족한 것처럼 보이니 보완을 하자’고 말하는 게 맞다. 또 하나, 감독이 지나치게 언론에 신경 쓰면 안 된다. 팀이 강해지면 언론은 좋게 평가하기 마련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팀을 강하게 만드는 것보다 언론에 더 신경을 쓰는 측면이 있다. (슈틸리케 감독이 기사나 댓글에 예민하다는 말도 있다) 그런 소문을 듣고 말하는 게 아니다. 팬이나 언론의 의문에 바로 바로 답을 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능동적일 수 없다. 그걸 보고 내가 느낀 거다.”

-일희일비하는 팬들의 이른바 ‘냄비근성’과 현주소를 냉정히 짚지 못한 언론의 책임도 있지 않나.

“분명 그런 측면도 있다. 조금 좋은데 굉장히 좋다고 하고, 조금 나쁜데 선수도 아니라고 한다. 과대평가하는 언론과 거기에 발맞추는 팬도 있다. 하지만 그건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스포츠를 소비하는 한 행태다. 스포츠를 생산하는 사람은 그런 소비 행태를 받아들여야지 소비의 방식까지 관여할 수 없다. 소비자가 우유를 사서 마시든 세수를 하든 우유를 만든 사람이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더 중요한 건 언론이 갈팡질팡하고 팬들이 오락가락해도 선수와 감독이 영향을 받아 흔들리면 안 된다는 점이다. 제대로 된 비판은 받아들이되, 비판을 위한 비판이나 감정 섞인 비판은 거를 줄도 알아야 한다. 또 감독이 과대 포장된 칭찬을 즐기면 안 된다. 감독은 칭찬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2016년 한국 축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전북 현대의 ‘심판 매수’ 사건이다. 전북 스카우터가 2013년 수차례에 걸쳐 심판에게 돈을 건넨 사실이 지난해 4월 드러나 유죄를 받았다. 구단은 프로축구연맹으로부터 승점 9점 감점을 당했고 ‘솜방망이 징계’라는 거센 비판이 일었다. 이 위원은 캐나다에 주로 머물면서도 이 사건을 주시했고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사건 직후에는 워낙 시끄러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또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내가 자칫 놓치는 부분이 있을 까봐 조심스러웠다”며 “모든 게 드러나고 마무리된 지금은 말할 수 있다”고 솔직한 의견을 밝혔다.

-전북의 징계 수위와 사후 처리는 바람직했다고 보나.

“전혀 바람직하지 않았다. 승부조작을 했는데 승점 9점 감점을 받았다는 것은…. (승부조작이 아니라 심판 매수라는 게 법적 판단인데) 승부조작은 누군가 돈을 줬고 그걸 받았으면 끝인 거다. 매수가 결과에 영향을 줬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프로연맹 상벌위원회의 결정으로 K리그는 세계에서 승부조작하기 가장 좋은 리그가 됐다. 안 들킨다는 전제 하에 심판에게 돈을 줘도 승점 9점만 감점 당한다면 할 만한 것 아닌가. 내가 충격 받은 건 이 사건을 바라보는 축구계의 시선이다. 구단에 속한 한 직원이 승부조작을 한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이 승부조작을 했는데 하필 그 구단에 속해있다는 거꾸로 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문제를 뜯어 헤쳐서 해결한 게 아니라 덮어버렸다. 지금 세대가 해결하지 않고 다음 세대로 떠넘겨 버린 무책임한 행동이다. 이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바뀌고 시간이 지난 뒤 10년 안에 비슷한 사건이 반드시 터질 거다. 어떤 사건을 깨끗하게 정리하지 않고 은근슬쩍 넘겼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역사가 증명한다. 그 때 가서 2016년에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걸 후회하겠지.”

프로축구연맹 수뇌부들이 전북 현대의 '심판 매수' 사건에 대해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K리그에 씻을 수 있는 상처를 남겼고 후속 조치 역시 미진해 여전히 논란거리다. 프로축구연맹 제공
프로축구연맹 수뇌부들이 전북 현대의 '심판 매수' 사건에 대해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K리그에 씻을 수 있는 상처를 남겼고 후속 조치 역시 미진해 여전히 논란거리다. 프로축구연맹 제공

이 위원은 “이번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되물었다. “축구 팬 아닌가”라고 답하자 그는 “팬도 그렇지만 전북 선수들이 가장 불쌍하다”며 격정을 토로했다.

“축구계 모든 구성원이 피해자이지만 가장 불쌍한 건 전북 선수들이다. 선수들은 최선을 다한 죄밖에 없다. 2016년의 전북은 K리그 역사에 남을 팀이었다. 감점을 안 받았으면 무패 우승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워 한국축구 최고의 팀으로 기억될 수도 있었는데 리그 우승도 못했다.”

-전북 감독과 단장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있다.

“구단에서 승부조작을 했다면 셋 중 하나라고 보는 게 합리적 추론이다. 감독이 지시했거나 아니면 단장이 지시했거나 아니면 감독, 단장이 모의했거나. 그런데 둘 다 아니고 아무도 몰래 구단 직원이 했다? 이런 경우는 상당히 이례적이고 특별해 믿기 힘들 정도다.”

인터뷰에 동석한 이영표 위원의 에이전트는 수위 높은 ‘쓴소리’가 계속되자 “과거의 일을 자꾸 언급하는 것보다 2017년을 위한 제언이 더 생산적이지 않겠느냐”고 우려를 표했다. 이 위원은 갑자기 테이블에 놓인 냅킨 한 장을 펼쳐 볼펜으로 점 하나를 찍었다. 그리고 옆에 또 점 하나를 찍은 뒤 말을 이어갔다.

“정확한 진단을 해야 앞으로 갈 길을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모든 선은 점으로부터 시작한다. 여기 점이 있다. 점의 방향을 예측할 수 있나? 못 한다. 점 하나만 있으면 내가 어디로 갈지 모른다. 옆에 점 하나를 더 찍어 연결하면 이 선이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있다. 과거를 반추하고 오늘을 펼쳐야 내일이 나온다. 그래서 우리가 과거에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 아는 건 대단히 중요하다. 과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현재를 정확하게 규정하지 않으면 내일로 나갈 수가 없다. 과거를 드러내는 게 곧 미래를 말하는 거다.”

-중국 슈퍼리그가 블랙홀처럼 슈퍼스타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한국 대표급 선수 상당수가 중국에서 뛰는 것에 대한 찬반 여론이 비등하다.

“둘 다 일리가 있다. 중국에서 돈 많이 벌며 편하게 뛰겠다는 선수도 있고 경쟁이 치열한 유럽에서 자긍심을 갖고 뛰겠다는 선수도 있는데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다. 정답을 내면 다른 쪽은 오답이라는 말인데 그렇게 말할 수 있나. 선수가 이적할 때는 가정의 문제, 지금 처한 상황, 팀에서의 위치, 나이, 연봉 등 다양한 고민을 한다. 팬과 언론의 시선도 그 조건 중 하나 일 뿐 전부가 될 수 없다는 의미다. 이적을 결정하는 이유는 다양한데 하나에만 맞춰서 옳다 그르다 규정할 수는 없다.”

본보와 인터뷰 중인 이영표 위원.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본보와 인터뷰 중인 이영표 위원.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이 위원은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보냈던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MLS) 밴쿠버 화이트캡스의 앰버서더로 구단 행정을 하고 있다. MLS의 올 시즌 평균 관중은 2만1,962명이다. 독일과 잉글랜드, 스페인, 멕시코, 중국에 이어 세계 6위에 해당한다. 3년 연속 평균 관중이 늘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다 1993년 출범 이래 한때 고사 위기에 처했다가 다시 부활한 MLS에 몸담으며 이 위원이 느낀 바가 적지 않다.

-한국 프로축구는 MLS에서 뭘 배워야 할까. 하나만 꼽는다면.

“우리는 늘 축구 환경의 문제, 돈의 문제를 탓했다. 하지만 해당 리그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건 환경도, 돈도, 아이디어도 아닌 사람이라는 걸 절실히 깨닫고 있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구체적인 사례를 든다면.

“밴쿠버가 홈에서 중요한 경기를 치른 적이 있다. 이 결과에 따라 순위가 바뀌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 양 팀이 치고 받으며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펼쳤는데 2-2에서 후반 추가시간 1골을 내줘 2-3으로 패하고 말았다. 경기 끝나고 구단 회장을 만났는데 너무 좋아하더라. ‘중요한 경기에서 아깝게 졌는데 웃음이 나오느냐’고 묻자 그는 ‘추가시간에 골 내줄 때 아쉬워하는 팬들의 표정을 보지 않았느냐. 이렇게 즐거운 게임을 보고 간 그 사람들은 반드시 다시 올 것이다’고 답했다. 승패가 아니라 이 게임이 팬들에게 매력적이었고 오늘 경기를 본 사람이면 무조건 다시 온다는 확신이 있으니 기분이 좋은 거다. 생각하는 관점이 다르다. 스포츠가 사람들의 심장을 빨리 뛰게 만들고 슬픈 감정을 자극하고 환호할 수 있게 만든다면 이기든 지든 상관없다는 마인드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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