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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아베의 노트, 박근혜의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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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아베의 노트, 박근혜의 수첩

입력
2016.11.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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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만 전국부장 cmhan@hankookilbo.com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2006년 9월 전후 세대 최연소(당시 52세)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등에 업고 권력을 쥐었다. 하지만 불과 1년 만에 스스로 총리직을 사퇴하고 물러났다. 집권 기간 그가 임명한 장관이 뇌물스캔들로 자살하는가 하면, 여성 비하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특정 간부에게는 중의원이 해임결의안까지 제출하는 등 사실상 국정 운영 마비 사태에 이르자 그는 총리직 사퇴라는 결단을 내렸다.

최정상에서 내려온 그는 집권 당시 과오를 스스로 정리하는 노트를 작성했다. 잘못된 인사를 수습하는 데 너무 많은 국정 에너지를 쏟아 부었고, 비효율적인 정책 결정 과정 등 참회와 반성의 글을 한 줄 한 줄 써 내려갔다. 아내에게조차 보여주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개인적인 생각을 여러 권의 노트에 담아 완성한 것이 이른바 ‘아베 노트’다.

아베 총리는 5년 후 재집권한 뒤 자신의 노트를 유용하게 활용했다. 이를테면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외교 정책은 뒤로 미루고, 집권 초기에는 경제 살리기에 집중한다는 것들이다. 1차 내각 당시 측근을 대거 기용, ‘친구내각’이라는 비아냥을 받았던 것을 감안해 반대 세력을 포용하는 용인술도 펼쳤다. 자민당 총재 선거 당시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인사들을 내치지 않고 당 간사장 및 장관으로 임명했다.

정치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사퇴 후 깨닫고 그 대안을 노트에 적었다. 총리가 큰 틀에서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이라면 관방 장관은 각료와 당내 의견을 조율하고, 관방 부장관은 관료조직을 아우른다는 식이다. 과감한 추경예산 편성, 2% 물가상승 목표 등 이른바 아베노믹스의 밑그림도 아베 노트에 적힌 시나리오였다. 아베 총리는 집권 후 일이 잘 안 풀리면 이 노트를 꺼내 읽으며 마음을 다 잡았다고 한다.

철저한 반성과 참회의 기록은 1년짜리 단명 총리로 그칠 뻔 했던 아베 총리가 2021년까지 임기 연장을 추진, 일본 최장수 총리를 꿈꿀 수 있게 된 원동력이 됐다.

아베 총리와 비슷한 시기에 대한민국호(號)의 수장이 된 박근혜 대통령도 수첩을 즐겨 찾은 메모광으로 알려져 있다.

2014년 제3차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린 네덜란드를 방문한 박 대통령이 빌뎀 알렉산더 국왕이 주최한 오찬에서 메뉴판에 열심히 메모하는 모습이 화제가 됐다. 당시 박 대통령이 이를 궁금히 여기는 데 대해 “국왕의 말씀이 너무 지혜로워 적고 있었다”고 답한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수첩 활용법은 아베 총리와 사뭇 달랐다. 자신의 수첩에 적힌 인물을 중심으로 등용하다 보니 늘 인재난에 허덕였다. 여러 계층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야 할 수첩은 자신이 보고 싶어하고 듣고 싶어하는 것만 담는 데 그쳤다. 결과적으로 박 대통령은 자신의 수첩을 잘못 활용한 탓에 최순실 국정농단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자초했다.

연 4주째 이어지는 촛불집회를 통해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 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본보가 지난 주 실시한 긴급여론조사는 물론, 사회 원로들 대부분이 대통령의 하야는 불가피하다는 견해를 보였다. 검찰마저 박 대통령을 국정농단의 공범이자 피의자로 지목한 이상 현실을 회피하기 어렵게 됐다.

이제 박 대통령은 한발 물러나 다시 수첩을 꺼내는 것은 어떨까. 아베 총리가 그랬던 것 처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이런 경우 어떤 대안이 필요했던 지 등 철저한 참회와 반성이 담긴 메모를 써 내려가면 어떨까. 훗날 이 수첩이 후배 정치인의 참고서가 돼 잘못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잡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나마 지금 대다수 국민들이 느낀 분노와 허탈감에 대한 속죄는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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