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여학생 살인 피해자 아버지의 애끊는 사연 "전학 와 사투리 못쓴다는 이유로 따돌림" “꿈에 나타난 딸이 좋은 곳에 있다고 하더라” “직접 탄원서 쓰고 창원과 대전법원 동분서주” “경찰, 적극적인 공조수사 하지 않아 아쉬워”
김해의 한 여고에 다니던 윤모(15)양은 올해 3월 중순 가출을 결심하고 집을 나섰다가 끔찍한 사건의 희생양이 됐다. 윤양은 이모(25)씨, 허모(24)씨, 이모(24)씨 등 20대 남성들에 성매매를 강요 받았고, 이들과 합세한 같은 또래의 양모(15)양, 허모(15)양, 정모(15)양, 또 다른 양모(15)양에게 잔혹한 폭행과 괴롭힘을 당하던 중 숨졌다. 딸을 찾으러 뛰어다니던 윤양의 아버지 윤모(50)씨는 이제 딸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기 위해 다시 뛰어다닌다. 윤 씨는 가슴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한국일보에 어렵게 털어놓았다.
- 사건 이후 김해를 떠났다고 들었다.
"딸의 장례를 치르고 5일 만에 김해 생활을 정리했다. 딸과 함께 생활하던 집에 혼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모든 게 다 후회됐다. 내 직장 때문에 경기도에서 부산과 김해로 딸을 전학 시켰는데, 내가 힘이 들어도 직장에서 버텨볼 걸 그랬나 싶었다. (김해 집에선)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아예 부산으로 집을 옮겼다."
- 딸과 쌓은 추억이 많았나.
"내게는 딸 밖에 없었다. 딸이 두 살 때 아이 엄마와 이혼한 후 혼자라도 번듯하게 키워보려고 애를 썼다. 배움이 짧고 직업이 변변치 않아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해주진 못했지만, 주말이면 같이 삼겹살을 구워먹으러 근처 식당에 가던 평범한 아빠와 딸이었다. 다만 딸이 경기도에서 부산과 김해로 전학하면서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교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등 학교 적응을 힘들어해 그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다. 그래도 요즘엔 나와 함께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친구도 사귀는 등 적응하고 있어서 안심했다."
- 요즘은 어떻게 생활하고 계신가.
"장례를 치르고 한동안은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딸이 지금도 옆에서 재잘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얼마 전 딸이 꿈에 나와 “아빠, 나 좋은 곳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 내 맘을 알았나 보다. 이제 딸을 위해 바쁘게 살려고 노력한다. 사건 진행상황을 확인하고 주말에 시간이 나면 딸의 장지를 찾는 게 일상이다. 일부러 운동도 나가고 교회 봉사활동도 한다."
- 사건 진행 소식은 어떻게 알고 있나.
"딸 아이가 죽은 후 막막했다. 법률에 관한 지식도 전혀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형편이 어려워 변호사를 선임하거나 법률상담을 받는 건 생각도 못했다. 검찰 수사관과 경남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서 물어 피해자가 공소장을 열람할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사건이 복잡하다. 피고인 중 4명은 두 건의 살인사건에 관련되어 있다 보니 법원만 창원지원과 대전지원 두 곳이다. 법원에 신속한 처벌을 요청하기 위해 동생과 함께 탄원서도 쓰고 직접 공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 딸이 가출한 후 한 차례 집에 돌아왔는데, 그때 아버지께 한 얘기는 뭔가.
"딸은 겁에 질려있었다. 성매매를 강요 받은 사실을 고백하면서 하루에 한끼만 먹는 등 학대 당한 사실도 얘기했다. 당장 경찰서에 찾아가자고 설득했지만 딸은 불안해했다. 내게 "오빠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집에 돌아올 수 없다"고 말했는데, 그때 그 말이 현실이 됐다.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 다음 날 함께 경찰에 신고하자고 했는데 다시 못 돌아 올 줄 몰랐다."
-경찰 수사를 지켜보면서 답답했던 점이 있었나.
"애가 타서 딸을 찾는 동안 내 입장에 서서 애써주는 경찰관도 있었지만 지지부진한 수사에 서운한 점도 많았다. 경찰에 실종신고를 낸 후 찾은 부서만 세 곳이 넘는다. 딸 아이는 1차 가출 이후 집에 돌아왔을 때 성매매를 강요 받았다는 사실을 고백했고, 그 사실을 경찰에 알렸다. 하지만 세 부서에서 내게 전해준 수사 진행상황 결과는 모두 달랐다. 한 경찰은 “하루에 김해에서 3~4명이 가출을 한다”며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더라. 그때 좀 더 적극적으로 수사를 나서주지 않은 데 대해 억울한 마음이 있다."
- 현재 심경은.
"내가 잘나지 못해 딸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지는 못했지만 딸은 내 인생의 전부였다. 만약 내가 배운 게 많고 돈이 있어 제대로 대응했다면 딸은 이런 말도 안 되는 만행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김지현기자 hyun162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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