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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북한 대홍수와 북한 인권법

입력
2016.09.20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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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굳이 TV 뉴스나 신문을 보지 않아도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대충 알 수 있다. 사실 대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뉴스를 깊이 들여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찾아볼 필요도 없이 가만히 있어도 휴대폰 창에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서 무수한 뉴스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정치나 경제 뉴스뿐 아니라 어느 저널에 어떤 논문이 실렸는지도 자세히 알 수 있다. 내가 스스로 검색하는 것보다 더 빨리 질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심지어 지난 12일 경주 지진도 페이스북을 통해 먼저 알았다.

이런 세상에도 정말 깜깜한 곳이 있으니 바로 북한이다. 지난 9일 북한이 어마어마한 규모로 5차 핵실험을 감행했지만 규모 5.0의 인공지진을 관측하기 전까지 우리 정부는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핵실험이 지하 수십 킬로미터에서 몰래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것은 뭐, 우리 정부의 정보력이 약하구나, 국방비 40조원도 부족하구나, 정도로 넘어갈 수 있다. 북한이 예고하고서 핵실험을 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더 놀라운 일이 있다. 함경북도 지역에 8월 말부터 9월 초 사이에 태풍과 저기압의 영향으로 많은 비가 내려 대홍수가 발생했다. 나는 이 소식을 추석 연휴 때야 처음 들었다. 검색해보니 이미 9월 4일부터 보도가 나오기는 했다. 전통적인 뉴스 매체를 봐야 하는 이유다.

우리가 북한에 대해 너무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다른 문제로 하자. 뒤늦게 들려오는 홍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과 미국 자유의소리(VOA) 방송에 따르면 이번 대홍수로 함경북도 일원에서 500여 명의 사상자와 실종자가 발생하고 14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60만명이 식수와 보건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자존심 세기로는 둘째라면 서러워할 북한 정부조차 ‘해방 후 처음 있는 대재앙’이라고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말할 정도니 그 피해 규모를 알 만하다.

피해가 가장 심각하다는 함경북도 회령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봤다. 한반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곳이다. 남한에 마라도가 있다면 북한에는 회령이 있는 거다. 날씨 검색을 해보니 오늘 새벽 최저기온은 4도에 불과했다. 이 와중에 핵실험을 한 북한 정권도 참 딱하기 이를 데 없다. “뭣이 중한디?”라고 따질 수밖에 없다. 핵실험으로 국제사회를 위협하는 게 중한가, 아니면 대재앙에 빠진 인민을 구하는 게 중한가. 심지어 아직까지 김정은은 홍수 지역을 찾아가 보지도 않았다.

“뭣이 중한디?” 이 질문을 이제 우리에게 해 보자. 북한이 5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고 핵무기 소형화에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기술까지 과시했으니 이젠 북한 핵은 미래의 위협이 아니라 현실적인 위협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대홍수로 수십만 명이 고통당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북한을 돕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원칙에 따라 무엇을 해야 할까.

박 대통령은 지난 8월 15일 71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렇게 천명했다.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파괴무기 개발과 대남 도발 위협을 즉각 중단하기 바랍니다. … 하면 할수록 국제적 고립은 심화되고, 경제난만 가중될 것입니다. 또한 북한 당국은 더 이상 주민들의 기본적 인권과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영위할 권리를 외면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북한 당국의 잘못된 선택으로 고통 속에 있는 북한 주민들의 참상을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 당국의 잘못된 선택으로 고통 속에 있는 북한 주민들의 참상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기본 입장이다. 즉 김정은 정권과 북한 주민을 분리해서 대하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정서다. 미국의 부시 정권에 반대한다고 해서 미국인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이라크 후세인에게 적개심을 가졌다고 해서 이라크 사람들이 싫은 것은 아니다. 만델라 대통령이 좋다고 해서 남아공의 무질서한 사회가 좋은 것은 아니다. 정권은 정권이고 시민은 시민이다.

대통령의 뜻이 김정은 정권과 북한 인민을 분리해서 대응하는 것이라고 해도 우리 국민의 일반 정서가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시민의 정서는 항상 오락가락한다. 그래서 우리는 법을 만들었다. 상황에 따른 정서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규칙을 정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는 ‘북한인권법’에 규정되어 있다.

북한 정권과 인민을 분리해서 대응하겠다는 것은 우리나라 정치권과 국제 사회의 오래된 정책이다. 미국에서는 2004년부터 북한인권법이 시행되고 있다. 주요 내용은 북한 주민의 인권신장, 탈북자 보호 그리고 인도적 지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3년 황우여 의원 등 23명의 당시 한나라당 의원들이 북한인권법을 발의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올해 3월 3일에야 제정되었으며 마침내 9월 4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북한에 대홍수가 나던 바로 그때다.

대한민국 북한인권법의 목적은 북한 주민의 인권을 보호하고 증진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제1조에 나와 있다. 그리고 8조에는 국가는 북한 인권증진을 위해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제공할 때는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인도 기준에 따라 투명하게 추진되어야 하며, 임산부와 영유아 등 취약계층에 대해 우선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

대통령의 통치철학과 대한민국의 법정신은 북한 정권과 인민을 분리해서 대응한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이 정말로 원칙인지 아니면 단순히 말 잔치로 그치거나 죽은 법조문일 뿐인지 가르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우리는 비커에 담갔으며 국제사회는 곧 리트머스 시험지의 색깔이 어떻게 변하는지 확인할 것이다. 분명 우리에게 기회다. 기회를 놓치지 말자. 경축사를 통해 말한 대로 그리고 법대로 하면 된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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