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나리’ 악몽 되풀이
역대급 강풍으로 피해 속출
5만여 가구 정전 암흑천지
선원 실종ㆍ선박 침몰 잇따라
하천 범람 차량 등 침수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면서 시커먼 물이 방안으로 콸콸 쏟아져 들어오더라고. 문 열고 나가 보니 목까지 물이 차올라 왔는데 1분만 늦었더라면 큰일 날 뻔 했지”
제18호 태풍 ‘차바(Chaba)’가 제주를 강타한 5일 새벽 제주시 용담1동 한천 주변에 살고 있는 김영운(83)씨는 간밤에 벌어졌던 아찔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몸서리쳤다. 김씨의 집안은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말해주듯 냉장고와 가구 등이 한데 뒤엉켜 아수라장이 됐다. 부엌 싱크대에는 머리 높이까지 물이 차 올랐던 자국이 남아 있었다.
김씨의 집 건너편 주차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폭우에 떠밀려 온 차량 30여대가 주차장 곳곳에 서로 뒤엉킨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한천은 지난 2007년 태풍 나리 내습 당시에도 범람하면서 13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한천 인근 주민들은 9년 전 공포가 밤사이 또다시 재연되자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태풍 나리 이후 제주도는 100년에 한번 발생하는 폭우까지 견딜 수 있도록 제주시 12곳에 저류지를 설치하는 등 대책을 추진해 왔지만 또다시 하천 범람을 막지 못했다.
김진수 용담2동 흥운마을회 총무는 “새벽에 나와보니 동네가 아수라장으로 변해있었다”며 “태풍 나리 때보다는 피해가 덜 했지만 불안하기는 매한가지”라고 말했다.
순간최대풍속이 초속 40m가 넘는 강풍과 폭우를 동반한 태풍 차바가 제주를 강타했다. 태풍이 밤새 휩쓸고 간 후 제주는 한마디로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하늘은 파랗게 변해있었지만 도심 곳곳에는 가로수가 뿌리 째 뽑혀 널브러져 있고, 간판과 건물 유리창이 부숴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역대급 강풍은 거대한 풍력발전기의 날개와 건물공사장의 대형 크레인도 부러뜨렸다. 5만여 가구에 정전피해가 발생하면서 제주를 암흑천지로 만들기도 했다. 주민들과 공무원 등이 이날 오전부터 피해복구에 나서고 있지만 피해가 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10월에 찾아온 태풍 차바의 영향으로 이날 제주시에 초속 47m의 최대순간풍속이 관측됐다. 2003년 9월12일 태풍 매미 때 기록했던 초속 60m에 이어 2번째로 강했다. 제주 서쪽 지역인 고산의 최대순간풍속도 초속 56.5m를 기록했다. 이는 태풍 매미 때인 2003년 9월12일 초속 60m, 태풍 루사 때인 2002년 8월31일 초속 56.7m에 이어 3번째다.
다른 지역도 강풍이 몰아쳤다. 서귀포지역에 초속 22.3m, 성산 30.4m, 가파도 43.9m, 월정 39.5m, 우도 37.4m, 한라산 윗세오름 34.6m, 성판악 초속 32m를 기록했다. 한라산 백록담에 설치된 기상청 연구용 장비에서도 최대순간풍속이 초속 59m를 기록하기도 했다.
태풍 차바는 예상과 달리 많은 비를 제주에 쏟아 부었다. 4일 자정부터 5일 오전 8시까지 한라산 윗세오름에 624.5㎜를 비롯해 제주시는 175.1㎜, 서귀포시 288.9㎜, 김녕 230.5㎜, 성산 141.6㎜, 고산 26.6㎜의 강수량을 기록했다.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면 제주 전 지역에서 피해가 속출했다.
제주도 재난안전대책본부와 한국전력 제주지역본부에 따르면 제주가 태풍 영향권에 접어든 4일 밤부터 5일 오전까지 5만2,413가구에서 정전이 발생했다. 이날 오후 1시 현재까지 3만6,345가구는 복구가 완료됐지만, 1만6,68가구는 복구작업이 진행 중이다.
정전으로 제주 유수암, 애월, 월산, 조천, 도련 등 정수장 5곳의 펌프가 작동하지 않아 해당 정수장에서 물을 공급받는 일부 지역에서 물이 나오지 않아 주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정전으로 인해 성산일출봉, 비자림, 만장굴에서는 매표 업무도 한때 중단됐다.
4일 오후부터 5일 오전까지 제주 기점 항공기 42편이 결항됐고, 지연 운항도 잇따라 관광객 등 이용객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폭우가 쏟아지며 제주시 한천이 범람해 차량 60여대가 침수 피해를 입었다. 이날 새벽 한천 주변 지역과 범람 위기를 맞은 제주시 산지천 주변 주민들에게 대피령이 내려졌다.
제주시 외도동 월대천도 범람해 주변 가정집과 펜션 등 10여가구가 침수, 주민과 관광객 등 50여명이 인근 주민센터나 친인척 집으로 대피했다.
농작물은 노지감귤을 비롯해 시설하우스, 양배추, 브로콜리, 감자, 당근, 무 등이 침수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타났지만, 정확한 집계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집계가 이뤄지면 피해규모가 적지않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해상에서도 사고가 잇따라 발생했다. 이날 오전 7시6분쯤 제주항 제2부두에서 제주 선적 연안복합어선 B호(5.4톤) 선장 송모(42)씨로 추정되는 남성이 선박 안전 확인차 선박과 선박 사이를 건너다가 추락해 실종됐다.
제주시 애월항에서는 정박해 있던 요트 P호(19톤)가 침몰하는 등 침몰 8척, 전복 3척, 침수 2척, 좌초 2척 등 크고 작은 피해가 발생했다.
강풍으로 시설물 피해도 속출했다. 이날 오전 6시56분쯤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국가풍력실증연구단지 내에 설치된 50m 길이의 풍력발전기 날개가 부러졌다. 오전 4시쯤에는 제주시 노형동의 한 공사장에서 타워크레인이 강풍에 쓰러져 인근 빌라 주민 6가구 8명이 주민센터로 대피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외에도 가로수가 넘어지거나 교통신호등이 꺾어지는 등 시설물 피해도 300여건 넘게 접수됐다.
한편 제주지방기상청은 이날 오전 10시 30분을 기해 제주도 전역의 태풍경보를 해제했다.
제주=김영헌 기자 taml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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