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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8.05 04:40

[SF, 미래에서 온 이야기] 하늘에서 살고 자동차와 섹스… 기계 탐닉의 끝은 어디인가

등록 : 2017.08.05 04:40

<22>뉴웨이브SF의 기수 J. G. 밸러드

#1

고층 빌딩 계급사회 ‘하이-라이즈’

차 충돌서 쾌감 추구 ‘크래시’ 등

문제적 작품 발표한 논쟁적 작가

“정신과 치료도 소용없다” 평도

#2

기술이 만든 인공적 생활 환경

그 안에서 변질되는 인간성 묘사

70년대 전위적 실험으로 SF 확장

‘밸러디언’ 단어 만들어지기도

20세기 전반기에 SF는 인류에게 과학기술의 어두운 면을 환기시키고 성찰로 이끌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조지 오웰의 ‘1984’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뉴웨이브SF’라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환경의 변화, 그리고 그에 따라 나타난 새로운 인공적 풍경. 그 안에서 인간은 이제껏 느껴보지도, 꿈꾸어 본 적도 없는 새로운 정서에 빠져든다. 금속덩어리 기계와 콘크리트, 강렬한 스피드와 압도적인 중량감, 인공 환경의 거대한 착시 효과 등등에 매료되는 신인류가 등장한 것이다. 이런 새로운 정서에 호응하는 뉴웨이브SF에서 가장 주목을 끈 작가가 J. G. 밸러드이다.

J. G. 밸러드의 작품에서 초고층 빌딩에 살며 더 높이 올라가기를 욕망하고, 자동차 충돌에서 희열을 느끼는 인물들은 막강한 기술문명에 매료되고 스스로 변질되는 신인류를 상징한다. 사진은 밸러드 원작 소설 '하이-라이즈’(위 사진)와 ‘크래시'의 영화 장면. 찬란ㆍ신필름 제공

황폐한 자족감으로 사는 인간

1973년, 밸러드는 장편 ‘크래시’를 내놓자마자 엄청난 논란에 휩싸였다. 자동차 충돌에서 성적 희열을 느끼는 주인공을 등장시킨 것이다. 교통사고 현장마다 다니며 피해자들의 끔찍한 모습을, 피와 살과 온갖 분비물들로 뒤범벅 된 구겨진 기계들을 본다. 그리고 스스로 끊임없이 차를 운전하면서 사고를 유발한다. 출간 전부터 원고 검토인에게 ‘이 작가는 정신과 치료도 소용없다. 절대 출판하면 안 된다’는 반응을 들었던 이 문제작은 발표된 지 4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읽기가 힘들다. 1996년에는 문제적 감독으로 명성이 높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크래시’를 영화로 만들어 역시 격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영화는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1975년에 나온 ‘하이-라이즈’에서는 초고층 아파트가 소우주와 같은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기대와 안락함을 갖고 입주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거주 층에 따라 패가 갈리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다가 결국 지옥 같은 상황으로 치닫는다.

밸러드는 이 밖에도 많은 이야기들을 발표했다. 대부분 인간이 만든 것들로 인해 심각하게 변질된 환경, 그리고 다시 그 때문에 심각하게 변질된 인물들이 나온다. 거침없고 파격적이며 금기를 깨는 특유의 스타일이 너무나 강렬해서 ‘밸러디언’이라는 형용사가 있을 정도다. 콜린스 영어사전은 이 단어의 의미를 ‘디스토피아적 모더니티’로 규정한다. 음울한 인공 환경에서 기술과 사회가 인간에게 끼치는 심리적 영향이 드러나는 풍경들이라는 것이다.

뉴웨이브SF의 탄생은 60년대 베트남전과 반전운동, 우드스탁 페스티벌(사진)로 대변되는 히피문화의 흐름에서 가능했다. 우드스탁 홈페이지

반전, 히피, 그리고 뉴웨이브SF

SF는 원래 과학소설(Science Fiction)의 약자이지만 뉴웨이브SF가 등장하면서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이라는 새로운 풀이가 등장했다. 60년대 세계 역사의 전면에 몇 가지 흐름에 떠올랐다. 베트남전쟁과 그에 따른 반전 운동, 유럽에서 시작된 68운동, 히피 등등. 이에 영향 받은 몇몇 작가들이 자유분방한 실험적, 전위적 스타일을 시도하면서 SF문학은 기존의 ‘과학적 합리성’이라는 최소한의 원칙 내지는 한계를 서서히 잃어갔다. SF 작가들이 SF 잡지에 발표하기에 SF로 분류될 뿐, 실제로는 종잡을 수 없이 난해하거나 우스꽝스러운, 또는 과감하고 파격적인 작품들이 연이어 쏟아져 나왔다. 전통적인 SF 팬이나 평론가들은 당황했고 도저히 Science Fiction이라 부를 수 없는 지경까지 나아갔다고 보았다. 그래서 새로운 풀이로 사변소설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80년대로 접어들도록 뉴웨이브SF는 독자적인 왕국의 구축에 성공하지 못했다. 다수의 전통적인 SF 팬들은 계속 냉대했고, 무엇보다 60년대의 청년 세대가 중장년이 되어 사회로 편입하면서 뉴웨이브SF의 지지층이 흩어지고 말았다. 냉전이 끝나고 국제 정세의 긴장이 완화되는 데탕트 시대가 된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결국은 이렇다 할 대표작도 없이 그저 밸러드나 로저 젤라즈니, 할란 엘리슨 같은 몇몇 작가들의 이름만 각인시킨 채 뉴웨이브SF의 시대는 저물었다. 돌이켜보면 한 시대의 실험 내지는 일탈이었다는 평가 정도로 마무리된 느낌이지만, 사실 뉴웨이브SF는 SF문학 전체의 창작 역량이나 외연의 확장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이전까지 SF와 주류문학을 확연하게 구별하던 경계가 뉴웨이브SF를 거치면서 상당히 낮아진 것이다. 게다가 80년대 중반 이후 태동한 사이버펑크SF에는 뉴웨이브SF의 유전자가 확실하게 주입되었다. 사이버펑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기계와 결합된 사이보그 인간’이야말로 밸러드가 제안한 인공 환경 속 새로운 인간의 완성형이나 다름없다.

J. G. 밸러드의 소설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화한 '태양의 제국'에서는 일본 전투기에 거수경례를 하는 장면이 나와 일 군국주의 미화 논란을 낳았다. 원작의 의도는 기계에 사로잡힌 원초적 심리를 묘사한 것이었다. 대종필름 제공

유니크한 작가, 신인류의 실마리

밸러드의 원작 소설을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화한 ‘태양의 제국’에서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다. 수용소의 주인공 소년이 일본 전투기를 보고 거수경례를 한다. 그러자 출격을 준비하던 일본군 조종사들도 진지하게 거수경례로 답한다. 개봉 당시 이를 두고 일본군 미화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사실 이 부분은 비행기나 자동차 등 기계에 매료되는 20세기 소년의 한 원형적 체험을 묘사한 걸로 보는 게 맞다.

인류는 20세기 이전까지 자동차나 비행기만큼 빠른 스피드의 금속성 인공물을 일상적으로 체험하거나 제어할 기회가 없었다. 주거 공간도 나무나 흙벽돌, 암석 등 천연 재료로만 구성됐었다. 그러나 화학과 물리학이 기술과 결합하면서 인간을 둘러싼 환경은 유례없는 이질성을 띄게 되었다. 이런 새로움에 탐닉하는 신인류가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 역사의 필연이었고, 그런 새로운 인간들을 주인공으로 다루기에 가장 적합한 장르야말로 SF였던 것이다. 작가지망생 시절 SF라는 세계를 발견한 밸러드에게 그런 새로운 인간상은 마치 자화상처럼 익숙하게 서술할 수 있는 캐릭터였을 것이다. 그렇다. 밸러드는 사실 그 스스로 인공 환경과 인공 물체에 정서의 뿌리를 둔 신인류일 것이라는 혐의가 짙다.

앞서 소개한 작품들은 밸러드식 디스토피아에 해당되는데, 그 다음으로 밸러드식의 묵시록적 재앙 이후 이야기들이 있다. ‘크리스털 세계’ ‘물에 잠긴 세계’ ‘불타버린 세계’ 등이다. 이 작품들에서 재앙의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기괴하게 변질된 세상이라는 종말의 모습에서 인간들은 절망에 빠지는 대신 그들 역시 기괴하게 변질되어 세상을 받아들인다. ‘크리스털 세계’에서는 글자 그대로 온 세계가 수정 같은 결정으로 바뀌어 버리는데, 이 이미지는 훗날 일본 SF만화 등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히로키 엔도의 만화 ‘에덴’에서는 결정이 되는 것이 새로운 차원의 우주적 생명체와 합일하는 것이다.

인류 기술 문명의 미래 전망은 솔직히 장밋빛이라고 할 수 없다. 물리적 환경의 문제는 오히려 기술적으로 해결할 여지가 있는 반면, 휴머니티를 유지하는 일이 더 비관적이다. 어떤 식으로든 돌파구를 찾아내야 하는 상황에서, 어쩌면 밸러드는 과감한 제안을 한 것 아닐까? 그가 건드린 금기며 파격이며 난해한 정서들은 생각보다 오래 곱씹어 봐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박상준ㆍ서울SF아카이브 대표

ⓒ The British Library Board, FG5960-5-26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1930년 11월 15일~2009년 4월 19일. 영국의 작가. 아버지가 인쇄회사의 중국 지사장으로 재직할 때 상하이 공공조계에서 태어났다.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가족과 함께 2년여 동안 수용소 생활을 했다. 종전 뒤 영국으로 돌아가 고교를 다니며 습작을 시작했고, 정신과 의사가 되려는 희망으로 킹스칼리지 의대에 진학했으나 글 쓸 시간을 내기 힘들자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뒤 카피라이터, 백과사전 세일즈맨 등을 하며 단편소설을 썼지만 발표 지면을 얻지 못했다. 20대 중반 공군에 입대한 뒤 캐나다에서 훈련을 받다가 미국 SF잡지를 접하고 처음으로 SF 창작을 시도한다. 30대 초부터 장편소설이 하나 둘 출판되면서 뉴웨이브SF의 기수로 주목을 받아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자전적 경험을 일부 반영하여 1984년에 낸 장편 ‘태양의 제국’이 여러 문학상을 받고 부커상 후보에도 오르며 SF계를 넘어 광범위한 명성을 얻었다. 2003년에 대영제국훈장 수훈자로 선정되었으나 ‘군주제를 위한 가식일 뿐’이라며 거부했다.

<소개된 책>

크래시

J. G. 밸러드 지음

김미정 옮김

그책 발행

하이 라이즈

J. G. 밸러드 지음

공보경 옮김

문학수첩 발행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시간의 목소리 외 24편

J. G. 밸러드 지음

조호근 옮김

현대문학 발행

크리스털 세계

J.G. 밸러드 지음

이미정 옮김

문학수첩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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