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발권력 동원엔 국민합의 필요"… ‘무조건 협력 없다’ 선 그어
정부 “구조조정용 추경은 요건 안맞아”… 재정보단 한은 역할 부각
안철수 “양적완화, 국민 부담 주는 무책임 행보”… 법 개정 험로 예고
다음주부터 본격화될 기업 구조조정 재원 마련을 위한 관계기관 간 논의를 앞두고, 정부와 한국은행 간 치열한 ‘기싸움’이 펼쳐지고 있다. 정부가 국책은행 자본 확충을 위한 한은의 역할론을 연일 펴고 있는 데 대해, 한은은 “정부가 먼저 나서라”고 공개적으로 맞받았다.
29일 한은은 ‘한국판 양적완화’ 논란이 불붙은 뒤 처음으로 “구조조정 재원 마련을 위한 한은의 발권력 동원엔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윤면식 한은 부총재보는 이날 통화신용정책 보고서와 관련한 브리핑에서 한국판 양적완화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구조조정 재원 마련은 기본적으로 재정의 역할”이라 전제한 뒤, “그럼에도 한은이 나서려면 먼저 국민적 합의 또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고 답했다. 그는 국민적 합의나 사회적 공감대 형성의 구체적인 형태로 “우선 관련 법 개정이나 국회의 동의 정도를 생각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책은행에 대한 출자나 채권매입의 근거가 될 한은법, 산업은행법 등을 국회에서 고치거나 적어도 여소야대 국면에서 야당의 동의 표명은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윤 부총재보는 이어 ‘재정을 동원하는 방안은 (국회 절차 등 때문에) 오래 걸리는 반면, 한은을 동원한 방법은 신속하게 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아무리 (구조조정 재원 마련이) 시급해도 정당한 절차를 거치는 것이 중앙은행의 기본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선을 그었다.
반면 정부는 이날도 한은의 역할을 재차 강조했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재정 투입의 대표적 수단인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 문제에 대해 “조선업 등의 구조조정 용도로만 추경을 편성하는 건 법적 요건에 안 맞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기타 공적자금을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유 부총리는 “그건 국민 세금을 바로 투입해야 하는 건데, 그렇게 하지 않을 방법을 먼저 고민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우리가 말하는 한국판 양적완화는 미국, 일본의 방식과는 달라 인플레이션이나 가계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히 제한적”이라고 강조했다. 직접 재정 투입의 어려움을 강조하고 양적완화 방식의 부작용이 덜 함을 강조함으로써 한은 역할론을 강조한 것이다.
한편 안철수 국민의당 상임 공동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한은이 돈을 찍으면 당장 재정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여 정부 성적표는 좋게 보일 수 있지만 결국 전 국민에게 골고루 부담을 지우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안 대표는 또 “추경이나 공적자금 투입 같은 동원 가능한 다른 수단을 제쳐두고 양적완화 카드를 꺼낸 건 무책임하며 일방통행식 통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한은이 양적완화 참여의 전제조건으로 야당의 동의를 제시한 상황에서 안 대표의 이 같은 입장은 향후 논의에 큰 변수가 될 전망이다.
김용식 기자 jawoh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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