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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오염된 순수의 시대

입력
2016.11.1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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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측근인 최순실씨 국정 개입 사실을 시인하는 담화를 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0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측근인 최순실씨 국정 개입 사실을 시인하는 담화를 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저로서는 좀 더 꼼꼼하게 챙겨 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치고,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 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10월 25일 박근혜 대통령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

최순실씨가 개인 태블릿PC로 대통령 연설문 등 주요 문건을 사전에 열람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다음날 대통령 대국민 담화다. 1분 40초에 불과한 분량, 질의 응답 생략, 핵심 의혹에 대한 침묵 등 여러 문제점이 있었지만 가장 거슬렸던 문구는‘순수한 마음’이었다. 일개 사인인 최씨가 국가 기밀 문서를 임의로 사전 열람하고 수정하도록 묵인했으면서도 의도가 순수했으니 이해해 달라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책임 지겠다는 대목이 빠졌다는 점에서 자신을 도와준 행위가 불법이든 아니든 문제삼지 말라는, 초법적이고 독선적인 정신세계도 읽힌다.

그런데 이날 인터넷에서는 29년 전인 1987년 10월 한 여성잡지에 게재된 ‘순수한 도움이 악의로 이용되었어요’라는 부제가 달린, 최순실씨 인터뷰가 돌연 화제가 됐다. 최씨 부친인 최태민씨 측근들이 박 대통령이 이사장으로 있던 육영재단 운영에 개입하면서 노사분쟁이 발생한 무렵이다. 박정희 대통령 사후 잊혀져 있던‘최태민-박근혜 관계’도 다시 입길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때라 최순실씨는 인터뷰에서 둘 관계를 적극적으로 해명한다. 내용은 이렇다. “당시의 위기 상황(육영수 서거)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는 의도에서 구국봉사단이란 순수한 민간단체의 모임을 만들었어요” “일에 대한 구심점을 박근혜씨를 중심으로 만들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당시 발기인들의 순수한 의도였던 것 같아요” “박근혜씨는 구국봉사단의 의도를 순수하게 받아들여”등등… . 해명 부분은 여덟 문장으로 돼 있는데‘순수하다’는 형용사가 세 번 나온다. 요즘 표현으로‘소오름 끼칠’만큼은 아니더라도 기시감을 느끼는 게 무리는 아닐 터다.

스스로 순수성을 주장하고 있는 점을 미뤄보건대 박 대통령은 용인(用人) 기준으로도 순수함을 중시하는 것 같다. 아버지가 심복 손에 살해당한 경험 때문에 박 대통령에게 순수함이란 아마 배신을 하지 않는 충성심 같은 것은 아닐까. 하지만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고도로 전략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 대통령이 사람을 쓰는 데는 순수한 사람보다는 전문성ㆍ합리성ㆍ경험있는 사람이 우선 순위가 돼야 한다. 대통령 사람들의 순수함이란, 직전 청와대 비서실장 말을 빌리자면 “짐이 곧 국가”였던 봉건시대 권력자에게나 필요한 윤리가 아니던가.

비극적이게도 우리 대통령이 순수한 마음으로 도움을 구했던 조력자에게는 공공선에 대한 최소한 존중, 공적 윤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없었다. 그 결과는 공적인 의사 결정 시스템 무력화(청와대 문서 유출, 인사 개입 의혹)나 공적 자원 사유화(예산으로 측근 사업 밀어주기, 직간접인 압력을 통한 자녀 대입 특혜 입학 의혹)로 드러났다.

양파 껍질이 벗겨지듯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롭게 폭로되는 대통령 조력자와 그 측근들 행태를 접하는 요즘 국민들은 ‘순수’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농락당한 심정일 터이다. 사면초가인 대통령을 위로한다며 “우리가 손으로 믿고 지켜야 할 순수한 대통령”(10월 27일, 정우택 새누리당 의원 사회관계망서비스), “처음에는 언니(박 대통령)를 위한 순수한 마음으로 도움을 줬을 것”(10월 26일, 김주하 MBN 앵커)이라고 했던 이들에게 냉소만 돌아온 건 당연할 일일 테다.

심리학자들은 솔직하지 않은 사람이 이를 방어하기 위해 “솔직하게 말하면”이라고 말문을 열고, 특정한 의도가 있는 사람이 그 의도를 감추기 위해 “순수한 의도”를 강조한다고 한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 싫은 자기 방어기제라는 얘기다. 순수한 의도, 선의와 같은 말이 오염되는 나라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절차와 제도를 따르는 게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이왕구 사회부 차장 fab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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