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 환경·노후 설비 평가 비중 높여 내구성 문제 없어도 신축 할 수 있어
개발이익 큰 강남 3구에 수혜 집중… 위화감 조성·자원 낭비 지적 많아
정부가 건물이 무너질 수 있는 안전성 문제가 아닌 층간 소음이나 일조권 등 주거환경이 열악하다는 이유로도 재건축 추진이 가능하도록 안전진단 규제를 대폭 완화하려는 것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재건축 연한만 지나면 멀쩡한 건물도 허물고 새로 지을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사회적 자원 낭비가 발생할 수 있는 데다 서울 강남구 일대 등 특정 지역에 수혜가 국한된다는 점에서 ‘부자만을 위한 정책’이라는 시선도 적지 않다.
20일 관련 부처들에 따르면 국토교통부는 부동산 시장 활성화를 위해 재건축 안전진단기준을 대폭 완화하는 내용을 담은 ‘재정비사업 활성화 및 규제 합리화 방안’을 마련, 이달 말께 발표할 예정이다. 지난달 말 새 경제팀이 내놓은 경제정책방향의 후속조치다.
지금까지는 건물이 안전하지 않을 경우에만 재건축이 허용됐지만 주거환경이 열악하거나 설비가 노후한 경우 등 생활 불편이 큰 단지도 재건축을 추진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겠다는 취지다.
현재 안전진단은 ‘구조안전성’(가중치 0.4), ‘건축마감 및 설비 노후도’(0.3), ‘주거환경’(0.15), ‘비용분석’(0.15) 순으로 평가한다. 이 가운데도 기울기, 내구성 등을 포함한 구조안전성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해왔다. 구조 안전성 성능점수가 20점(100점 만점) 이하인 경우 다른 분야에 대한 평가를 중단하고 ‘재건축 실시’로 판정한다.
국토교통부는 내구성이 심각하게 떨어진 상태가 아니어도 재건축을 할 수 있도록 설비 노후도나 주거환경의 평가 비중을 높이는 세부 지침을 마련할 계획이다. 업계에서는 안전에 지장이 없어도 건축물을 철거하고 새로 지을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파급력이 적지 않을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실제로 그 동안 안전진단 불합격으로 재건축 추진을 못하거나 기간이 길어진 아파트가 적지 않았다. 송파구 잠실주공5단지는 지난 2006년 첫 도전 이후 4년 만에 안전진단을 통과했고,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도 ‘4수(修)’ 만에 안전진단 문턱을 넘었다. 대형 건설사 한 관계자는 “최근 재건축 아파트의 사업 기간은 7~10년 정도였는데 안전진단 기준이 완화되면 이 기간이 1년 정도 단축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이 때문에 송파구 장미아파트 등 일부 단지들은 정부 발표 후 안전진단 주민설명회를 개최하는 등 재건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움직임도 서울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등에 국한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이 꼽는 수혜 예상 단지도 강남구 개포동 우성3차, 현대1차, 대치동 미도 1,2차, 송파구 가락동 극동아파트 등 강남 일대에 집중돼 있다. 이들 단지는 정부 발표 이후 호가가 2,000만~3,000만원 가량 상승했다. 노희순 주택산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재건축이 개발 이익을 전제로 추진되는 사업이라는 점에서 강남 지역 외에는 안전진단 규제가 완화돼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남 일대 거주자들에게만 특혜를 주는 정책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원갑 KB국민은행 수석전무위원은 “강남을 건드려서 부동산 시장을 살리려는 부동산 정책의 연장선에 있는 방안”이라며 “재건축 이주 수요로 인한 전셋값 상승으로 이어져 서민들의 주거 안정을 해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안진걸 참여연대 팀장은 “일부 지역에서는 건물 외벽이 무너져도 재건축을 못하고 사는 곳들이 많은데 멀쩡한 건물도 허물어 다시 짓고 이익을 챙길 수 있도록 허용해주겠다는 것”이라며 “자원낭비는 물론이고 지역간 위화감을 부추길 수 있는 정책”이라고 말했다. 박원갑 수석전문위원은 “이런 식으로 재건축 기준을 완화하면 건물을 굳이 관리할 필요가 없어져 웬만한 문제가 있어도 그냥 방치하게 되는 잘못된 관행이 자리잡을 수 있다” 고 지적했다.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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