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경영권 분쟁 등 지금이 적기
국민 관심도 높고 미뤄서도 안돼
공약 무시한 現정권 역주행 맞서야
재벌의 민낯이 요즘처럼 자주 도마 위에 오른 적은 없었다. 지난해 말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 사건으로 불거진 그들의 ‘갑질’에서부터 헤지펀드인 엘리엇메니지먼트의 도발에서 비롯된 삼성의 불투명한 경영권 승계 과정, 형제 및 부자간 흙탕물 싸움으로 번진 롯데의 경영권 분쟁까지. 실상에 비해 부풀려지거나 왜곡된 측면도 없진 않지만, 하나 하나 재벌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인 감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총선을 앞두고 야당이 이를 놓칠 리 없다. 그렇잖아도 노동ㆍ공공ㆍ교육ㆍ금융 등 새누리당의 4대 개혁 드라이브에 밀려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한 상황이었다. 9월1일부터 시작되는 19대 국회의 마지막 정기국회를 앞두고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를 맞불 공세 카드로 꺼내 들며 재벌개혁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은 ‘재벌 저격수’로 불리는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초선이던 17대 의원 시절부터 재벌의 지배구조와 경영권 승계 문제에 대해 날 선 행보를 이어온 그가 재벌개혁특위 위원장을 맡자 재계는 잔뜩 긴장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재벌 개혁은 말처럼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박 의원이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글을 올렸듯 노무현 전 대통령조차 ‘권력이 재벌로 넘어갔다. 대통령인 나로서도 한계를 느낀다’며 두 손을 들었을 정도다. 재벌 권력의 힘이 막강한 탓이기도 하고, 잘못 손을 대는 경우 경제에 미치는 타격이 상당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칫 총선을 앞두고 야당의 선명성 도구로 활용될 뿐 아니냐는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은 것도 그래서다.
28일 여의도 의원회관에서 만난 박 의원은 이를 두고 “그만큼 재벌 개혁 문제가 힘들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경제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고용이나 투자가 악화될 것이라는 걱정 때문에 재벌 개혁을 못하겠다고 하면 대한민국 경제는 남미 수준으로 전락할 것”이라며 “대주주가 전횡을 부리는 황제경영의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_지난해 10월 갑작스레 원내대표에서 물러난 후 당의 주요 직책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10개월 만에 재벌특위 위원장을 맡은 이유는.
“재벌개혁, 경제민주화는 내가 2004년 처음 국회의원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11년 동안 검찰 개혁과 함께 온 힘을 기울였던 주제다. 그러나 검찰개혁보다 진척이 없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나서게 됐다.”
_왜 지금이 재벌 개혁의 적기라고 보는가.
“어느 때보다 재벌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도가 높다. 삼성과 엘리엇의 분쟁, 롯데 경영권 분쟁 등 최근 일련의 재벌 사태를 관통하는 것은 ‘공정한가’와 ‘공평한가’이다. 젊은 세대의 가장 큰 불만이 불공정과 불공평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나의 미래가 있는가라는 점 아닌가.”
_구체적으로 재벌 개혁은 뭘 하자는 건가.
“시장의 독점과 재벌의 지배 구조 문제가 핵심이다. 경제 선진국은 시장 독점에 엄격하다. 반면 우리는 재벌 독식 구조가 점점 강해지고 있다. 재벌 3,4세들이 빵집, 분식집 등 골목 상권까지 장악해 버리지 않았나. 반면 창업을 바라는 젊은이들에게 아무런 기회도 주지 않고 있다. 최근 서울시내 면세점 사업자 선정만 봐도 그렇다. 이미 면세점 사업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재벌들에게 또 기회를 줬다. 면세점 사업은 특별한 노하우 없이 자본만 있으면 할 수 있다. 몇몇 중소기업들이 손 잡고 자본만 마련해도 운영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줬어야 한다고 본다.”
_기존의 순환출자구조도 개혁 대상인가. 순환출자가 없어져도 재벌 총수의 지배력은 여전히 공고할 거라는 지적이 많다.
“물론 기존 순환출자 해소가 재벌 개혁의 전부는 아니다. 그렇지만 롯데처럼 총수가 0.05%의 지분을 가지고 93조원짜리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순환출자의 원리는 공정하지 않은 게 분명하다. 기존 순환출자를 어느 정도 해소하지 않고서는 재벌 총수의 전횡 이슈가 계속 불거질 수밖에 없다.”
_하지만 국회에서 기존 순환출자는 손을 안 대는 것으로 합의하지 않았나. 강제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다른 나라 기업들이라고 왜 적은 자본을 가지고 어마어마한 기업을 지배할 수 있는 순환출자 구조가 탐이 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할 수 없는 건 제도 때문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다중대표소송제다. 모회사가 자회사로 인해서 손해를 입은 경우 주주들이 모여서 소송을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소송에 걸리면 엄청난 손해배상을 해야 되기 때문에 대부분 모회사가 자회사를 100% 소유하고 있는 거다. 상법 개정으로 이 제도가 도입되면 우리나라도 기존 순환출자 구조가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_주주 권리 강화를 위한 다른 상법 개정 필요성도 강하게 제기되는데.
“그렇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아침 일찍 열거나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주총회를 여는 식으로 정작 주주들이 총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게 다 소액주주가 무서워서 그러는 것이다. 소액주주도 주주총회에 참석할 수 있게 의결 정족수를 분명히 못 박는 등 상법을 바꾸는 것도 필요하다. 사실 이런 내용의 상법 개정은 박근혜 정부 들어 법무부가 발의한 바 있다. 그런데 이 개정안이 현 황교안 국무총리가 법무부 장관에 취임한 뒤 없어져 버렸다. 이 상법 개정안만 제대로 통과시켰어도 대한민국 경제 시스템이 지금보다 훨씬 건전해졌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대선공약에 따라 법무부는 2013년 7월 ▦다중대표소송제와 이사회의 업무감독 기능 강화 ▦집중투표제 단계적 의무화 ▦감사위원회 위원 분리선출방식 도입 ▦전자투표제 단계적 의무화 등 경영진에 대한 이사회의 감독 권한 강화를 골자로 한 상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그러나 의견수렴 과정에서 재계는 강하게 반발했고, 결국 국무회의 등 정부 발의 입법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중단됐다.
_그렇다면 재벌 개혁의 목표는 재벌 해체인가. 너무 이상론적인 생각으로 보인다. 재벌 없이 대한민국 경제가 돌아갈 수 있다고 보는가.
“만약 재벌이 좋은 제도라면 다른 나라들은 왜 안 하겠나. 모순이 있으니까 안하고 못 하는 거지. 반면 우리는 그 모순과 그런 단점을 알면서도 말을 못하고 있다. 저 재벌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망하는 거 아닌가 그런 걱정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니까 30년째 재벌 순위도 안 바뀌고 있다. 그렇다고 재벌을 해체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담금질을 통해 대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대기업이 전문화돼야 한다. 일본도 전후(戰後) 재벌을 해체하고 소니처럼 단독 브랜드로 승부하고 있지 않은가. 특히 우리나라는 국내총생산(GDP)의 절반 이상을 4대 기업이 차지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재벌 한 사람이 투자 한 번 잘못하면 나라 전체가 휘청거릴 수 있다는 얘기다. 지금처럼 대주주가 전횡을 부리는 황제경영의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국민들도 이 부분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_재벌 없이는 기업의 고용과 투자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재벌 개혁과 고용ㆍ투자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기업들은 과거와 달리 정부에서 아무리 투자를 하라고 떠밀어도 비전 없는 투자는 하지 않는다. 고용과 투자 악화 때문에 재벌 개혁을 못하겠다고 하면 대한민국 경제는 남미 수준으로 전락할 것이다. 일해도 희망이 없는 사회에서 누가 열심히 일 하겠나.”
_그 동안도 재벌 개혁은 계속 추진이 됐지만 눈에 띄는 큰 성과는 없었다. 왜 그렇다고 보는가.
“거센 재벌들의 반발 때문이 아니겠는가. 금융 자본과 산업 자본을 분리한다는 금산분리 관련 법안의 경우, 2004년 발의한 법안이 1년이 훨씬 넘어 2005년 12월에야 통과됐다. 게다가 처음 내가 낸 법안에는 3년이었던 유예 기간이 5년으로 늘었다. 당시 재벌들은 참여정부가 끝나면 정권이 바뀔 것으로 예상하고 청와대 등을 상대로 대대적으로 로비를 했고, 사실상 성공한 셈이다. 노 전 대통령이 뒤늦게 권력이 재벌로 넘어갔다고 후회한 것도 그런 이유다.”
_국회에 대한 재벌의 로비와 협박, 회유가 막강하다고 언급한 적도 있는데.
“가령 특정기업에 대한 재벌 개혁에 나선다고 하면 증권가 정보지에 국회의원과 관련한 허무맹랑한 악성 루머가 돌기 시작한다. 또 재벌기업에서 국회의원 보좌관을 대거 스카우트해서 국회와의 유착을 강화한다. 앞으로 조금 나갔다 싶으면 금세 후퇴하는 것이 재벌 개혁이다. 그 정도로 로비가 강하다.”
_박 의원이 지난달 발의한 외국인투자촉진법(외촉법) 개정안을 두고선 ‘대기업 옹호’로 돌아선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다. 삼성과 엘리엇의 분쟁이 한창일 때 대한민국 경제의 원활한 운영을 현저히 저해하는 경우 외국인 투자를 제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인데.
“엄하게 할 건 엄하게 하되, 지켜줄 건 지켜줘야 원칙이 있는 나라가 된다. 특정 기업이 외국인 손에 넘어가면 경제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 경우에 보호장치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비슷한 법이 선진국엔 이미 다 갖춰져 있다. 미국 같은 경우 외국인투자위원회에 미국 회사를 외국에 파는 것이 국가 안보 등을 해칠 위험이 있는지 여부를 살펴보고 불허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엑슨-플로리어법이 대표적이다.”
_재벌 개혁을 하면 청년 일자리가 만들어 진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던데, 지나친 비약 아닌가.
“적은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건 불공정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안다. 재벌이 주식을 많이 사서 지분을 늘리면 이 불공정을 해소할 수 있다. 주식을 많이 가지려면 일부 계열사를 정리해야 한다. 그럼 그 만큼 다른 회사들, 특히 중소, 중견 기업에게 기회가 생긴다. 청년들도 창업을 통해 회사를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숨 쉴 틈이 생긴다. 이런 것은 누구에게나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지는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우리 나라에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성공할 수 있는 기업인은 충분히 많다.”
_당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특위를 꾸려 추진하는 것은 처음이다. 재벌개혁특위가 제대로 힘을 받을 수 있을까.
“특위는 먼저 의원들이 개별적으로 제출한 재벌 개혁 관련 법안을 리뷰하고, 주요 이슈를 꼽은 다음 국정감사를 통해 밀어붙일 것이다. 국감 때 정부가 재벌기업들에게 얼마나 많은 특혜를 줬는지, 그 특혜로 인해 젊은이들이 얼마나 숨을 못 쉬고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이어 연말까지 최소한의 재벌 개혁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속도를 낼 것이다. 그리고 내년 총선에서 재벌 개혁을 주요 이슈로 삼을 것이다. 내년 우리 경제는 올해보다 더 안 좋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경기 하락 국면에 청년들은 희망이 더 적어질 거다. 청년들의 희망을 위해서라도 우리 사회는 재벌 개혁이라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우리나라는 그만큼 뒤처지는 국가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정재호 기자 next88@hankookilbo.com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심윤지 인턴기자(이화여대 영어영문과 4)
●박영선 의원은
경남 창녕
MBC보도국 LA특파원ㆍ경제부 부장
17,18,19대 국회의원
국회 첫 여성 법사위원장
민주당 정책위의장ㆍ민주당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
민주통합당 최고위원ㆍ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ㆍ국민공감혁신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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