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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도 곡할 밀실살인… 용의자 그림자도 없다"

입력
2016.05.3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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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화장실 슬리퍼 신고 무참히

사건 당일 초인종 누르거나 출입카드 찍힌 기록도 없어

피해자가 문열어 줬을 가능성 커

“범인 검거 시간문제” 헛되이

아파트 출입구 등 3중 검색 관문

출입차량ㆍ주민 샅샅이 뒤졌지만 용의자 그림자조차 안 남아

5년여 수사에도 오리무중

빈집ㆍ옥상 이용 가정 해보고 계단 등 혈액반응 검사도 허사

경찰 “원점서 재조사 꼭 잡을 것”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지어진 지 1년도 안 된 경기 남양주시의 한 고급 아파트 단지는 철저한 보안을 자랑했다. 외부차량은 차단기를 통과해야만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걸어서 단지까지 들어왔다 해도 아파트 동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선 출입카드나 비밀번호 입력도 필수다. 집 현관에는 ‘도어록’이 달려 있어 3중 보안 관문을 거쳐야 했다. 아파트 곳곳엔 폐쇄회로(CC)TV도 꼼꼼히 설치된 상태였다.

그런데 2010년 어느 날 이 아파트 A동 14층에 누군가 다녀갔다. 경로당을 가려던 노인이 집 안에서 살해됐다는 사실은 분명했지만 범인이 현장에 들어오고 나간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난 12일 찾아간 아파트 단지는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담소를 즐기던 주민들이 ‘6년 전 그 사건’ 얘기에는 금세 표정이 어두워졌다. “동짓날 무렵이라 확실히 기억 나. 경로당에서 같이 옹심이를 만들기로 했는데 그 할머니가 안 왔거든. 할머니 죽인 범인 잡는다고 경찰 수십 명이 며칠씩 아파트를 돌아다녔어.” 동네 노인 중 왕할머니로 불리는 한 노인이 “그런데 아직도 범인을 못 잡은 거냐”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 사건 이후 아파트에는 ‘범인은 지하실에 몰래 숨어서 사는 사람’ 등 괴담도 돌았단다. 6년 전 그 집에 누가 다녀간 걸까? 그림자도 안 남긴 밀실 살인사건의 범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범인 침입 흔적도, 사라진 물건도 없는 범죄 현장

“경로당 가야 되니 끊자.” 2010년 11월 17일 오전 8시쯤 이덕순(당시 69세ㆍ가명) 할머니는 서울에 사는 지인과 주식 투자, 근황 등 사는 얘기를 나눈 뒤 18분 만에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외출복을 차려 입고 나갈 준비를 마쳤던 이씨는 끝내 현관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날 아침 7시도 되기 전에 골프를 치러 집을 나섰다 밤 11시가 넘어 집에 돌아온 남편 박인철(당시 73세ㆍ가명)씨는 안방 침대에서 흉기에 얼굴과 목을 10차례나 찔린 처참한 부인의 모습을 마주해야 했다. 결정적인 사인은 목 경동맥에 입은 상처. 날카로운 흉기를 든 범인과 사투를 벌였던 피해자의 양손에는 방어흔이 11군데나 남아있었다. 부검 결과 사망 추정 시간은 이날 오전으로 분석됐다. 오전 8시 지인과의 통화 이후부터 낮 사이였다.

늦은 밤 신고를 받고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범인이 사용한 흉기를 피해자의 집에서 사용하던 부엌칼로 확인했다. 집 안에 범인이 남긴 발자국은 이 집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슬리퍼 자국이었다. 슬리퍼는 발바닥에 혈흔이 묻은 채 원래 있던 화장실에 놓여 있었다. 범인은 화장실 슬리퍼를 신고 안방에서 범행 후 다시 화장실에 들어가 피해자의 피가 묻은 자신의 손 등을 씻고 슬리퍼를 벗어둔 것으로 추정됐다.

조사 결과 노부부는 십수억대 재산으로 부유했지만, 누구에게 원한을 산 일이 없었다. 돈을 목적으로 한 범죄로 보이지도 않았다. 범인이 작은방 장롱을 뒤진 흔적이 있었지만 사라진 물건은 없었다. 오히려 고가의 명품시계가 침대 위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어 강도 사건을 연출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성범죄도 아니었다. 현관과 창문도 강제 침입 흔적이 없었다. 피해자가 직접 문을 열어줬을 가능성이 커 경찰은 일단 면식범의 소행으로 추정했다.

범인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 없었다. 입주가 시작된 지 10개월 정도밖에 안 된 아파트여서 CCTV도 최신형이었던 만큼 영상 자료 등으로 아파트를 드나든 사람들을 일일이 대조해보면 시간은 걸리더라도 용의자를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경찰은 봤다. 범인이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남양주 아파트 밀실 살인사건/2016-05-29(한국일보)
남양주 아파트 밀실 살인사건/2016-05-29(한국일보)

‘독 안에 든 쥐’였던 범인 행방은 오리무중

경찰의 기대와 달리 사건 해결의 실마리는 좀체 나오지 않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수사관들의 탄식이 쏟아졌다.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현관 도어록에 출입카드를 대거나 비밀번호를 직접 눌러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안에서 문을 열어줘야 한다. 피해자의 집에는 최신 보안장치인 ‘월패드’가 달려 있어 손님이 초인종을 누를 경우에는 바깥 카메라에 상대방의 모습이 자동으로 찍혔다. 하지만 사건 당일 초인종을 누른 사람은 없었다. 카드나 비밀번호를 사용할 때 자동으로 저장되는 로그 기록이나 삭제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혹시 집안에 미리 들어와 있던 범인의 소행은 아닐까 사건 일주일 전 CCTV까지 뒤졌지만 의심할 만한 내용은 없었다. 사건을 맡은 경기북부경찰청 장기중요미제사건전담수사팀 관계자는 “사건 당일 현관 카메라 사각지대에서 노크를 한 뒤 피해자가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집으로 들어갔다는 추측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의아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아파트 A동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 역시 입주민은 출입카드나 비밀번호를 이용해야 하고, 외부인은 출입하려는 호수에 직접 연락해 안에서 문을 열어줘야 하지만 피해자의 집 호수를 누른 외부인은 없었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같은 동 주민이거나 다른 집을 방문하는 것처럼 속였다고 가정도 해봤다. 그러나 사건 당일 오전 5시부터 자정까지 A동 출입구, 엘리베이터 내부, 1층 엘리베이터 앞 CCTV 등에 찍힌 188명의 당일 행적을 이 잡듯이 뒤졌어도 범인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계단을 이용했더라도 1층 엘리베이터 앞 CCTV에는 모습이 찍힐 수밖에 없는 구조였는데 역시 특이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경기 남양주경찰서의 한 형사는 “수사할 수 있는 건 정말 다 뒤졌는데도 흔적이 없으니 상상의 나래도 펼쳤다”며 “범인이 아직 입주가 안 된 빈 집 창문으로 침입해 계단을 이용했거나, 15층 아파트 옥상에서부터 내려왔다는 가정도 해봤다”고 회상했다. 물론 이러한 침입 방식도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결론 났다. 실제로 A동 미입주 세대가 있던 2, 3층 집에는 사건 당일 출입한 사람이 없었다. 옥상에서 14층으로 내려간 흔적도 나오지 않았고, 1~15층 계단 전체에서 실시한 혈액반응에서도 특별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늘로 사라진 범인 꼭 잡겠다”

현장에 특이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피해자 손톱 등에서 범인의 유전자정보(DNA)는 검출되지 않았지만, 집안에 있던 물컵 등 식기에서 6명 것으로 보이는 DNA 일부가 발견됐다. 신발장 거울에서는 지문도 나왔다. 그러나 지문은 1년여 전 이사할 때 일했던 이삿짐센터 직원 것으로 확인됐고, 6명의 DNA 정보 대조 결과 용의자는 없었다.

경찰은 CCTV 영상을 대조해도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하자 A동 주민 모두의 행적을 확인했고, 사건 당일 단지 출입차량 운전자 모두를 살펴봤다.

하지만 5년여에 걸친 수사에도 범인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자 결국 이 사건은 올해 1월 미제로 종결됐다. 경기경찰청 제2청이 지난 3월 경기북부경찰청으로 개청하면서 장기미제수사팀이 사건을 다시 수사하기로 했다. 이민희 장기미제수사팀장은 “다시 원점”이라며 “면식범, 모르는 사람, 청부살인까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해 꼭 범인을 잡을 것”이라고 의지를 다졌다.

남양주=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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