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데이빗 브룩스는 미국 역사를 ‘자유주의 시대’(1930~1960년대)와 ‘보수주의 시대’(1980년대~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구분한 바 있다. 이 구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서유럽에도 적용할 수 있다. 자유주의 시대가 ‘복지국가 시대’였다면, 보수주의 시대는 ‘신자유주의 시대’였다. 1970년대는 복지국가 시대에서 신자유주의 시대로 바뀌는 전환기였다.
주목할 것은 이 전환기의 특징이다. 장기 경기침체, 과도한 복지 지출, 정부의 재정 위기에 따른 ‘국가의 실패’는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를 이뤘던 복지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이런 국가의 통치불가능성은 결국 ‘시장의 복권’을 주창하는 신자유주의의 등장을 가져왔다. ‘대안은 없다’는 주장을 앞세운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는 이렇게 의기양양하게 역사의 전면에 부상했다.
1970년대 서구사회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은유는 1978~1979년 영국의 ‘불만의 겨울’이었다. 위기의 경제, 무능한 정치,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상태에 빠진 사회가 불만의 겨울의 배경을 이뤘다. 당시 공원묘지 노동자 파업으로 여기저기 관들이 나뒹구는 황량한 풍경은 복지국가 시대의 조종(弔鐘)을 알리는 불만의 겨울의 극적인 광경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모습도 불만의 겨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로 성장에 가까운 시장, 리더십이 실종된 국가, ‘두 국민’으로 양극화된 시민사회는 불만의 겨울과 적잖이 닮아 있다. 신자유주의에서 포스트신자유주의로 가는 이 전환기의 불확실성과 통제불가능성을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동하는 공포’로 명명했다. 삶의 불안과 위험을 언제 어디서나 만나지만 정체를 제대로 알기 어렵고 결과에 올바로 대응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 유동하는 공포의 중핵을 이룬다.
흥미로운 것은 유동하는 공포 시대의 정치적 선택이다. 2008년 이후 미국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오바마정부를 선택했다면, 독일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메르켈정부를 선택했다. 영국은 보수로 갔으며, 프랑스는 보수에서 진보로 바뀌었고, 일본은 중도진보에서 강경보수로 돌아섰다. 우리사회의 경우 2008년 이명박정부와 2013년 박근혜정부의 출범에서 볼 수 있듯 보수가 진보를 앞서 왔다.
역설적인 것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마감하는 전환기의 두드러진 정치적 흐름이 보수의 우위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8년 금융위기 직후 ‘시장의 퇴각’과 ‘국가의 복권’이 예견됐지만, 중도보수의 메르켈정부에서 극우에 가까운 아베정부에 이르기까지 많은 나라들에서 보수는 상대적으로 강고한 정치적 헤게모니를 발휘해 왔다. 보수가 이렇듯 정치적 다수를 이룬 까닭은, 한편으로 사회통합을 내세우거나 국가주의를 동원한 보수 정당의 전략적 기민함과, 다른 한편으로는 전환기라는 유리한 정치적 공간이 열렸음에도 신자유주의에 제대로 맞설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진보 정당의 정책적 빈곤에 있었다.
이런 역사적 흐름 속에서 최근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한 버니 샌더스의 돌풍이 안겨주는 의미는 예사롭지 않다. 샌더스 신드롬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증대해온 불평등에 대해 노동자계급은 물론 중간계급의 인내가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것을 함축한다. ‘1 대 99 사회’를 거부하고자 했던 2011년 ‘점령 시위’는 대형 금융기관 해체, 강력한 소득 재분배 추진, 최저임금 대폭 인상 등을 열렬히 주장하는 샌더스를 통해 정치적 대표성을 표출하고 있는 셈이다.
현실 정치의 구속과 정책의 지속가능성을 고려할 때 샌더스의 정치적 미래를 낙관하기만은 어렵다. 결국 찻잔 속의 태풍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환기의 유동하는 공포와 강화돼온 불평등에 대한 시민적 분노가 어느 나라든 갈수록 커져 왔다는 점이다. ‘헬조선’이라 일컬어지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의 불평등을 기록하는 우리사회의 정치적 미래는 과연 어떻게 펼쳐질까. 샌더스 돌풍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일까. 2008년 이후, 어느새 10년에 가까워지는 전환기의 한가운데서 던져보는 질문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