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1.11
1월 11일은 이돈명의 기일이다. 가난 때문에 힘겹게 살았고, 법조인으로서 쉰 넘어 조금 나아지려던 삶을 접고 인권변호사로 결단하듯 나서선, 질 수 없는 싸움이라 여기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어도 결코 물러서지 않던 이. 2011년 오늘 88세의 그가 작고했다.
이돈명은 1922년 전남 나주 다시면 운봉리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마친 뒤 독학으로 한국 최초 민립대학인 조선대 전신 광주야간대학원에 입학했고, 28세이던 50년 조선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52년 사법시험(당시 고등고시 3회)에 합격해 판사가 됐으나 5.16 쿠데타 직후 사표를 내고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 주로 민사 사건 전문변호사로 일했다. 그리고 74년, 그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합(민청학련) 사건 변론을 맡고 있던 황인철(1940~1993) 홍성우(1938~) 변호사를 찾아가 할 일을 달라고 청했다. 대부분 이런저런 사적 인연에 얽혀 들어서는 그 길을, 그는 그렇게 혼자 찾아가서 시작했다. 53세였다.
이후 그가 맡은 변론 사건들은, 나열만 해도 오롯이 유신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 약사라 할 만했다. 75년의 김지하 반공법 위반 사건, 3ㆍ1민주구국선언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리영희ㆍ백낙청 반공법 위반 사건, 동일방직ㆍ원풍모방 사건, 송기숙 등의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 크리스천아카데미 사건, 통혁당 재건위 사건과 YH무역 농성사건, 10ㆍ26 김재규 변호와 전민학련,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서울대 프락치사건,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그는 대부분 패소했고 친한 이들은 그를 ‘유죄 변호사’라 부르기도 했지만, 그건 그의 우직한 낙관과 성실한 의지에 대한 조아림 같은 거였다. 86년 그는 스스로도 징역 8개월 형을 받는데, 그건 5ㆍ3항쟁 주동자로 수배된 이부영을 고영구 변호사가 숨겨주고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고 약속한 데 따른 옥살이였다.
그는 조선대 총장,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초대 회장등 이런저런 기관ㆍ단체 대표를 맡으며 말년까지 인권운동의 큰 흐름에서 낙오하지 않았다. 2001년 천주교 인권위원회는 ‘이돈명 인권상’을 제정했고, 지난 해 양심과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를 지원하고 대체복무제를 사회 의제화하는 데 애쓴 단체‘전쟁 없는 세상’에 그 상을 수여했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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