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은 얼마 전 이석기 전 의원 등의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상고를 기각했다. 문제는 대법원이 통합진보당(이하 ‘진보당’) 내 비밀혁명조직인 RO의 실체는 없고 내란음모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 판결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가 내린 진보당 해산결정의 핵심논거의 신빙성을 흔들어 놓았다.
그뿐 아니다. 헌재는 진보당 사건에서 다른 사실의 인정에서도 명백한 오류를 범해 이를 바로잡아야 했다. 헌재의 착오로 무고하게 거명된 이들은 국가배상청구소송을 공언하고, 진보당은 재심청구를 검토한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재판관들에 대한 탄핵소추까지도 거론된다. 권위 실추의 먹구름이 헌재를 덮고 있는 것이다.
헌재소장이 국정감사 때 진보당 해산청구에 대한 신속한 결정을 촉구하는 집권당 의원의 발언에 2014년 내 결정을 약속했을 때부터 헌재의 굴욕은 예고되고 있었다. 헌재가 정권의 압력에 굴복해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을 심리를 졸속으로 진행했음은 물론 사건의 결론도 왜곡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자초한 셈이다.
정당해산 제도는 주지하는 것처럼 야당탄압을 위해 악용될 위험이 크다. 이 때문에 유럽인권재판소는 정당해산 요건을 가능한 한 좁게 해석하고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할 것, 피소된 정당에게 공정하고 적법한 재판절차를 보장할 것 등을 요구해 온 것이다.
헌재도 결정문에서 일견 이 같은 기준에 부합하는 해산요건을 제시하는 한편, 은근히 분단상황의 특수성과 국민정서도 고려해야 한다며 요건의 상대화를 위한 문호를 열어놓았다. 더구나 헌재는 비상상황이 해산요건의 적용에 어떤 식으로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제적 표준은 비상상황을 이유로 한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다. 헌재는 이처럼 우리의 특수한 사정과 이에 편승한 종북세력 심판론에 기대어 한 정당을 정치무대에서 추방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진중한 법리전개와 치밀한 사실입증을 소홀히 한 것이다.
RO와 관련된 대법원과 헌재의 판단이 다른 이유를 정당해산절차에 민사소송법령이 준용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법은 정당해산절차의 본질에 반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민사소송법령을 준용하도록 했다. 국가정보원, 검ㆍ경 등 막강한 감시기구를 거느린 정부가 해산을 청구하고, 정당해산이 민주주의의 실현에 불가결적 의미를 갖는 정당의 자유에 대한 치명적 제한임을 감안하면 정당해산에 민사소송에서나 통용되는 증거법의 적용은 적법절차의 원리에 반하는 것이다. 개탄스런 것은 반대의견이 지적하듯 헌재가 민사소송의 수준에서조차도 진보당 해산의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입증해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진보당 사건의 관건은 헌재가 대선부정 스캔들로 정통성 위기에 직면한 정권이 국면전환을 위해 주도적으로 조성한 종북세력 심판이라는 여론과 정권의 거대한 압력에서 독립해 심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헌재는 헌법의 소리만을 경청하며 당사자들의 주장을 엄정히 판단하는 험난한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시류에 편승해 진보당을 함께 짓밟는 손쉬운 길을 선택했다. 긴장이 풀린 채 서둘러 작성한 결정문으로 헌재는 그간 축적해 놓은 신뢰의 증발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재무장을 기획한 아데나워의 정치적 압력을 버티다 못해 5년 만에 이를 반대한 독일공산당에 대한 금지판결을 내렸던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초기 재판관들은 대조적인 행보를 보였다. 초대 소장은 독일공산당 금지에 대한 반대를 공개적으로 표명함은 물론 정부의 신청철회를 기대하며 사건처리를 지연시켰다. 졸지에 병사한 그를 승계한 제2대 보수파 소장조차도 연방정부에게 청구를 철회해 줄 것을 기대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는 공산당금지 판결을 준비하기 위해 변증법적 유물론을 수강하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이런 리더십 속에 재판부는 독일공산당도 인정했던 증거들에 의거해 교수자격청구논문의 질을 갖췄다는 평을 듣는 독일공산당 금지판결을 전원일치로 내린 것이다.
독일의 사례는 헌재의 권위는 그 구성원들의 헌법에의 헌신과 정치권력에 용감하게 맞서 독립성을 지키려는 노력 없이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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