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맹하경 기자

등록 : 2017.11.15 04:40
수정 : 2017.11.15 09:48

[방전포비아] 난 ‘배터리 거지’가 되고 싶지 않다

등록 : 2017.11.15 04:40
수정 : 2017.11.15 09:48

#충전... 충전... 집착하는 '스몸비'들

카페서 업무ㆍ공부 하는 사람 많아

콘센트 자리는 눈치 싸움 전쟁터

멀티탭 나눠 쓰며 케이크 선물도

#지하철서도 배터리 대여 서비스

이름은 행복 충전하는 '해피스팟'

이용자들 너무 몰려 운영 차질도

지난 10일 평소 직장인들이 자주 찾는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최모(29)씨와 직장동료가 4구까지 멀티탭을 테이블 콘센트에 꽂고 노트북PC, 카메라, 보조배터리 등 각종 스마트 기기들을 충전하고 있다.

직장인 최모(29)씨는 출퇴근용 가방을 노트북PC만 쏙 들어가는 크기의 토트백에서 큼지막한 배낭으로 바꿨다.

아침마다 매일 챙겨야 하는 물건이 하나둘 늘어난 탓인데 최근에 새로 들여놓은 물건이 4구짜리 멀티탭이다. 업무 환경이 자유로운 편이라 조용한 카페에 앉아 일할 때가 많다는 그는 자리를 잡으면 어김없이 이 멀티탭을 꺼낸다.

최씨는 “요즘 ‘카공족’(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많아서 웬만한 카페들은 업무나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리마다 콘센트를 하나씩 달아 둔 큼지막한 테이블 같은 걸 마련해 둔다”며 “하지만 콘센트 하나로는 노트북PC, 스마트폰에다 직업상 항상 들고 다니는 카메라까지 충전하기엔 턱없이 모자라서 아예 멀티탭을 샀다”고 말했다. “카페 직원들 눈치가 보이긴 하지만 방전되는 게 더 불안하다”는 그는 “주문을 더 많이 하더라도 콘센트에 전자기기들을 무조건 꼽아두는 편”이라고 했다. 하루는 콘센트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실패한 사람이 맞은편에 앉길래 멀티탭을 나눠 쓰라고 했더니, 조각 케이크를 선물 받았다고 한다. 콘센트를 허하는 자, 선심을 베푸는 자가 된 이 시대, 사람들은 ‘배터리 거지’가 되는 게 두렵다.

‘복합 휴게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는 카페에서 콘센트 자리는 그야말로 치열한 눈치 싸움의 전쟁터다. 자리를 뜨려고 책하나를 덮었을 뿐인데 어떻게 알았는지, 이미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옆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 다른 손님과 마주하는 민망한 상황을 겪어본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콘센트를 찾아 헤매던 카공족과 ‘코피스족’(카페+오피스,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에 ‘카페는 커피 마시며 쉬는 공간이므로 우린 커피 맛으로만 승부한다’던 커피 프렌차이즈 커피빈도 결국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커피빈에서 지난 16년 간 찾아볼 수 없었던 콘센트가 지난해부터 들어서기 시작했다. 덕분에 지난해 커피빈코리아 영업이익이 64억원으로 2015년(39억원)보다 2배 가까이 늘었다. 2014년(124억원)보다 70% 급감하며 곤두박질쳤던 실적을 반등시킨 건 콘센트의 힘이었다.

영업직 허재준(41)씨는 업무 시간 대부분을 외근으로 보낸다. 그가 항상 들고 다니는 보조배터리는 무려 4개다. ‘4개까지 필요하냐’는 질문에 허씨는 아찔했던 기억부터 떠올렸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 중이었는데 스마트폰 배터리가 간당간당해 무작정 내린 후 “고객에게 전화해야 하는 시간은 다가와서, 미친 듯이 콘센트를 찾아다녔다”며 “지하철 역사 벽에 콘센트가 있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고 했다. 지하철 화장실 콘센트로 충전 중이던 스마트폰을 기다리느라 벽에 기대 서 있던 사람도 자주 만난다는 그는 보조배터리마저 방전될 수 있다는 불안함 때문에 자꾸 그 수를 늘려갔다. 허 씨는 “요즘엔 피우던 담배도 전자담배로 바꿔서 충전해야 하는 물건이 자꾸 늘어나니 기댈 건 보조배터리뿐”이라며 “출근해서 가장 먼저 하는 게 4개 보조배터리를 차례로 충전시키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카페 문화까지 바꾼 ‘배터리 거지’들에게 지하철도 응답했다. 서울도시철도공사는 서울 지하철 5~8호선 152개역에 무인 휴대폰 보조배터리 대여기 ‘해피스팟’을 설치하고 대여 서비스를 시작했다. 배터리를 빌리는 곳이 행복한 공간이라니, 방전은 불행인 게 현실인가 보다. 3시간 동안 무료로 쓸 수 있고 어느 역이건 대여기만 있다면 바로 반납할 수 있는 이 서비스는 이용자가 너무 많이 몰려 배터리 공급이 부족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보조배터리가 필수품으로 자리 잡자, 삼성전자는 보조배터리로도 충전할 수 있는 신개념 노트북PC를 출시하기도 했다.

배터리가 없는 상황을 견디지 못해 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방전 직전이거나 공항, 역사 등 공공장소 곳곳의 콘센트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배터리 거지’라고 하는데, SNS에 현재 상태를 표현하는 ‘해시태그(#)’ 단골 수식어가 돼 버렸다. “퇴근길에 게임을 해야 하는데 망했다” “이 카페는 왜 콘센트가 없는 걸까” “3시간 버텨야 하는데 배터리가 15%라 벌써 불안” “배터리가 없으니 정말 아무것도 못함” 등 배터리 의존증은 일상 깊숙이 들어앉았다.

배터리에 대한 집착증이 심해질수록 ‘스몸비’(스마트폰+좀비ㆍ스마트폰에 정신 팔려 위험하게 걷는 사람들)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디지털 기기로부터 멀어지려는 ‘디지털 디톡스’ 운동이 점점 더 확산된다. 한국정보화진흥원에 따르면 스마트폰 이용을 잘 조절하지 못해 문제를 겪는 ‘스마트폰 과의존위험군’이 대부분 연령층에서 늘어나고 있다. 청소년(10~19세)의 경우 2013년 25.5%에서 2015년 31.6%로 늘었다. 지난해에는 30.6%로 다소 줄었지만 전 세대 중 과의존위험군 비율이 가장 높다. 성인(20~59세)은 2013년 8.9%에서 2016년 16.1%로 2배 가까이 늘었다. 심지어 영ㆍ유아(3~9세)까지 2015년 12.4%에서 2016년 17.9%로 1년 사이에 5.5%포인트나 증가했다. 지난해 처음으로 실시한 고령층(60~69세) 조사 결과에서는 11.7%가 과의존위험군으로 분류됐다. 고령층도 10명 중 1명이 스마트폰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글ㆍ사진 맹하경 기자 hkm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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