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선 다리 위 끝에 서로를 불러보지만~”. 지난 2일 서울 마포구 홍익대 인근 윤형빈소극장. 호랑이 얼굴 문양이 그려진 노란색 마스크를 쓴 사내가 무대 위에 등장하며 영화 ‘복면달호’(2007) 속 ‘이차선 다리’를 호기롭게 부른다. 박력이 넘치는 사내다. 옛 신발 광고 CF처럼 무대 위 의자에 올라가 내려오더니, 의자를 거침 없이 발로 차 객석의 호응을 이끈다. 놀 줄 아는 사내는 바로 방송인 이경규(56).
가면 쓰고 무대 오르고, 코에 흰 물감까지
“아이고 힘들어라.” 이경규는 노래를 끝낸 뒤 마스크를 벗고 “창피해 환장하는 줄 알았다”며 투정을 부리며 분위기를 띄웠다. 말은 툭 내뱉어도 여간 신경을 쓴 무대가 아니다. 이경규는 ‘이차선 다리’를 부르기 위해 지난달 29일 배우 차태현에 직접 전화를 걸어 가면을 빌려왔다. 자신이 제작한 영화를 위해 만든, 세상에 딱 하나뿐인 가면이기 때문이다.
이경규는 개그 공연 ‘응답하라 이경규’에서 거침 없이 망가진다. 이경규가 코미디를 위해 무대에 서기는 1997년 MBC ‘오늘은 좋은 날’ 코너 ‘별들에게 물어봐’를 끝낸 뒤 19년 만이다. 그는 코 밑에 흰색 물감을 칠해 코를 흘리는 ‘바보’(공연 코너 ‘별들에게 물어봐’)가 되기도 했고, 자신이 키우는 반려견 두치(공연 코너 ‘개쇼’)와 훌라우프를 통과하다 자신의 발에 걸려 무대에서 넘어지기도 했다. 방송에서 볼 수 없었던 ‘예능 대부’의 굴욕이자 오랜 만에 보여준 슬랩스틱 코미디다. “아우, 아우~ 그거 봤어요? 그냥 뛰어 넘기만 하면 되는 건데 넘어져서…” 공연 직후 전화로 만난 이경규는 멋쩍은 듯 농담으로 선수를 쳤다.
자신의 코너 반을 ‘몸개그’로... ”행복하다”
이경규는 90분 공연 동안 판토마임과 쌍절곤쇼 등 자신이 선보인 코너 반을 ‘몸개그’로 채웠다. 오십 대 중반인 나이에다, 2년 전에 협심증으로 큰 수술까지 받아 생과 사를 오갔던 그다. 무리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이경규는 “그래서 오늘 공연만 해야겠다”고 웃더니 “말로 하는 건 한 시간도 할 수 있는데, (관객들에) 성의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경규는 1981년 제1회 MBC 개그콘테스트로 데뷔했다. MC가 아닌 개그맨으로 펼친 공연인 만큼, 나이나 방송 연차 같은 계급장을 떼고 무대 위에서 몸으로 웃기고 싶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이경규는 “그게 우리 직업이지 않냐”라고 반문했다.
“그 동안 버라이어티에만 주력하다 오랜 만에 개그 무대에 서 관객들을 웃기니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행복하기도 했고요. 좀 더 일찍 (개그 공연을)할 걸 그랬나 봐요. 하하하.”
31일까지 이어질 개그 공연을 위해 이경규는 필라테스 등의 운동을 하며 체력 관리를 했다. 이경규는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흰색 민소매 셔츠를 입고 오른손으로 아령을 든 채 운동을 하는 모습의 사진을 걸어뒀다. 절권도로 다져진 그의 청년 시절 몸을 보듯 팔 근육이 여전히 탄탄하다. 그의 사진 위에는 ‘달려보자 인생’이란 문구가 적혀 있다. 올해로 데뷔 36년을 맞은 이경규가 코미디 공연에 나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번 공연 끝나고 전세계 투어 한 번 돌까 봐요, 하하하.”
“예능계 안성기”… 이경규의 36년 방송의 뒷모습
이경규는 1990년대 초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코너 ‘몰래 카메라’와 ‘양심 냉장고’를 줄줄이 성공시키며 주목 받았다. 1993년엔 국세청이 발표한 ‘연예인 소득랭킹 톱10’에 개그맨 가운데 유일하게 오를 정도로 부와 인기를 동시에 누렸다. 일정을 끝내고 집에 들어가면 침대 밑에 두둑하게 현금을 깔아둔 걸 들춰보며 인기를 즐겼을 때라고 한다.
이경규는 지상파 방송3사 연예대상에서 8번이나 대상을 차지했다. 1990년대의 영광에 머물지 않고 KBS2 ‘해피선데이’의 코너 ‘남자의 자격’(2009~2013)같은 리얼 버라이어티와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2011~2016)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방송 흐름을 놓치지 않은 덕이 크다. 이경규는 ‘응답하라 이경규’ 공연을 연 이유에 대해서도 “오래 방송을 하다 보니 표현 방법에 한계가 왔다는 걸 느꼈다”며 “무대에서 공연을 하면 내가 생각한 것들과 TV를 통해 보여 드리지 못했던 것들을 좀 더 보여 드릴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는 마음으로 무대에 섰다”고 했다. 방송에서는 거친 입담과 권위적인 ‘꼰대’의 모습으로 웃음을 주지만, TV 밖에서는 항상 변화를 고민하고 있는 이경규의 알려지지 않은 뒷모습이다.
이경규는 올 상반기 MBC ‘마이리틀텔레비전’에서 유행에 민감한 20대 방송인들도 시도하지 못한 ‘눕방’(누워서 방송)을 선보이며 파격을 이끌었다. 이경규는 올 하반기 또 다른 방송 실험을 계획 중이다. 이경규의 소속사인 코엔스타즈의 안인배 대표는 “이경규씨가 후배 개그맨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예능 프로그램을 올 가을 방송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경규의 오랜 활약의 비결로 방송 관계자들은 그의 방송인으로서 순발력과 책임감을 꼽았다. ‘개그 대부’ 전유성은 “이경규는 개그맨 출신이라 방송 진행할 때 순간적인 애드리브가 뛰어나다”며 “방송에서 거칠게 말을 하는 것 같지만 듣고 불쾌하거나 찜찜한 기분이 안 드는데, 이는 평소 그의 말 습관이 정돈돼 ‘19금 발언’을 해도 듣는 이로 하여금 거북함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봤다.
방송에서 보이는 고집스럽고 까다로운 모습과 달리 이경규는 제작진들 사이 ‘예능계 안성기’로 통한다. 권석 MBC 예능1국 부국장은 “연예인들이 인기를 얻을수록 출연료를 자존심이라 생각해 출연료에 굉장히 민감한데, 의외로 이경규 씨는 그 부분에 고집이 없고 쿨하다”며 “안성기 씨가 한국 영화 제작비 상승 요인으로 배우들의 높은 출연료가 문제가 돼 작품 출연료를 동결한 적이 있는데, 이경규 씨도 그런 편”이라고 말했다.
40년 가까이 방송 활동을 하며 한 번도 구설에 휘말리지 않고 자기 관리를 해 온 것도 이경규의 장수 비결이다. 자유분방한 개그맨 출신 방송인들이 음주운전이나 도박 등에 연루돼 사회적 물의를 자주 일으킨 것과 비교하면 대조적이다. 이경규 주변 인물들에 따르면 이경규는 술자리를 가져도 대부분 1차에서 가볍게 끝내고, 자정 전에 귀가한다. 카메라 속에서 개그맨으로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그를 통해 받은 환호에 들뜨지 않고 스스로 엄격하게 일상을 꾸려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일까. 예순을 앞둔 ‘예능 대부’가 공연장에서 건넨 덕담의 여운은 오래 갔다.
“60대 접어드니 다들 얼굴이 비슷해지더라고요. 70대 되면 돈이 많아도 돈을 쓸 수 없겠죠. 너무 사소한 것에 얽매이며 살지 마세요.”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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