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물보다 1.8m 높은 키리바시,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 상승
어획량·경작지 감소 등 피해 심각, 거리엔 부랑자 넘치고 취객 활보
기후 난민 딜레마, 2050년까지 최소 2500만명 발생
선진국들 심각성 인식하지만, 경제 손실·대량 이민 우려해 외면
키리바시 공화국은 호주 동북쪽 미크로네시아 중부에 위치한 길버트 제도와 라인 제도, 피닉스 제도에 있는 33개의 환초 지역을 영토로 하는 국가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18일 가톨릭 최고 권위 사목교서인 ‘회칙’을 통해 기후변화 대응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키리바시가 주목받고 있다. 교황은 회칙에서 “화석 연료에 기반을 둔 산업사회가 일으킨 기후변화의 주된 희생자는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밝혔는데, 키리바시는 교황이 언급한 대로 기후변화로 환경재앙이 집약적으로 벌어지는 곳이다.
인구 11만명이 사는 키라바시는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수몰 위험에 직면해있다. 키리바시는 현재 약 2,000㎞ 떨어진 피지섬에 영토를 구입하며 대규모 이주계획을 검토하고 있는 실정이다. 키리바시 토착민 이와네 테이티오타(39)는 전세계에서 처음으로 ‘기후 난민’의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 뉴질랜드와 법적 투쟁도 벌이고 있다. 기후변화에 맞서 최전선에서 처절한 생존 투쟁을 벌이고 있는 이들이 바로 키리바시 주민들이다. “테이티오타의 삶을 살펴보면 기후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이들이 처한 상황과 우리 세대가 곧 직면할 미래 등을 가늠해볼 수 있다”고 미국 외교안보 전문매체 포린폴리시는 최근 전했다.
키리바시와 테이티오타
키리바시 전 국토의 해발은 해수면보다 평균적으로 약 1.8m 정도 높은 것에 불과하다. 지구 온난화가 지금과 같은 속도로 진행되면 21세기 말쯤에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약 0.9m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때쯤이면 키리바시는 바다의 잦은 범람으로 국토가 침식 당하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으로 바뀌거나 바다 밑으로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키리바시 주민들은 이미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겪고 있다. 연간 강우량이 감소하면서 주민들의 식수원인 지하수가 소금물로 바뀌고 있고, 근해에 풍부하던 어획량은 급감했다. 또한 조수가 높아질 시기에는 파도가 육지로 범람하면서 경작지로 쓰일 수 있는 땅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키리바시 주민들이 그나마 편의시설이 갖춰진 수도 타라와로 피난을 오면서 인구가 과밀현상을 빚고 있고 이로 인해 물가상승과 실업률 급증, 극심한 교육과 의료 서비스 부족 등이 발생하고 있다.
테이티오타는 키리바시 외곽 지역인 타비테우에아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키리바시에 살면서 스스로가 기후변화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고 포린폴리시에 고백했다. 바닷물이 땅을 침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동네 사람들과 모래와 자갈로 된 주머니를 들고 방파제를 쌓는 게 일상이었지만 당시 그는 이를 “바닷가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으레 하는 일”이라고 인식하는 게 고작이었다.
테이티오타도 결혼을 한 후 다른 사람들처럼 희망을 품고 타비테우에아에서 타라와로 건너왔다. 그러나 수년 동안 아무런 일거리를 찾지 못했고 절망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밭에서 농작물을 길러보려 했지만 모래처럼 부서지는 흙과 끓는 듯이 작열하는 태양 앞에서는 어떤 작물도 충분히 여물지 못했다. 치안도 최악이었다. 길거리에는 부랑자가 넘쳐났고 대다수가 술에 취해 거리를 활보했다. 싸움이 붙으면 누구든 칼을 꺼내 드는 게 예삿일이었다. 타라와에 인구가 급증하면서 위생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에 따르면 수도 타라와의 주민 중 약 60%는 화장실이 없어 노상에서 볼일을 해결했다. 2012년 실시된 수질 검사에서 타라와 내 모든 지하수에서 대장균이 검출됐다.
결국 테이티오타는 2007년 취업 비자를 얻어 뉴질랜드 이주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아내는 간병인 자리를 얻었고 그는 농장에서 일을 구했다. 이후 약 8년 간 뉴질랜드에 살면서 세 명의 자녀도 얻었다. “뉴질랜드에서의 나날은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풍요로운 삶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테이티오타, 기후난민 인정 위한 법적 투쟁
그런데 테이티오타가 2011년 중반쯤 뉴질랜드에서 취업비자 연장 시기를 놓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비자 연장을 변호사에게 위임했는데 테이티오타가 관련 비용을 제때 지불하지 못하자 변호사가 아무런 상의도 없이 관련 업무를 중단했다. 테이티오타는 2011년 12월 경찰의 불심검문에서 불법 체류 신분이 드러나며 체포됐다. 테이티오타는 자신이 키리바시로 송환될 경우 자녀들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며 뉴질랜드 법원에 선처를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엔에 따르면 당시 키리바시의 유아 사망률은 1,000명 당 58명으로 뉴질랜드보다 10배나 높았다.
테이티오타가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의 원인을 제대로 직시하게 된 건 마이클 키드 변호사를 만나면서부터다. 당시 키드 변호사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사무실을 열고 토착 원주민들의 어려운 법적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키드 변호사는 테이티오타를 만나는 순간을 회고하면서 “그가 기후변화의 희생자임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뉴질랜드에는 키리바시와 같이 수몰 위험에 처한 투발루 등의 섬나라 이민자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고, 이들도 국외 추방 등의 법적 문제에 봉착해있었다.
키드 변호사는 뉴질랜드 법정에 1951년 제정된 유엔 난민협약에 근거해 테이티오타를 기후변화에 따라 자신의 나라에서 도망친 ‘난민’으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난민협약은 ‘생명이나 자유가 위협받을 수 있는 지역으로 추방 혹은 송환돼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테이티오타도 기후 온난화로 인류에 대한 간접적 박해가 이뤄지는 키리바시로 송환돼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키드 변호사는 “사람들은 단순히 나라가 물에 잠기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문제는 그들이 기후변화로 인해 삶의 모든 부분에서 질적인 저하를 겪고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테이티오타는 처음에는 키드 변호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뉴질랜드에 살면서 키리바시의 높은 파도와 침수가 피할 수 없었던 일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환경문제를 다룬 기사와 방송을 접하면서 키리바시에서 자신을 괴롭혀왔던 문제들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비정상적이고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됐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기후 문제 때문에 난민을 인정한 전례가 아직 없다. 뉴질랜드 고등법원도 2013년 10월 열린 재판에서 키드 변호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환경 재앙은 비차별적으로 발생하지 누군가를 특정해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라며 “ 또 테이티오타를 기후 난민으로 인정할 경우 자연재해를 겪고 있는 전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같은 자격을 주게 돼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초래하는 대량 이민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테이티오타를 기후 난민으로 인정할 경우 법적 판례가 생기면서 가뭄과 지진, 산사태 등 전세계 환경 재앙에 직면한 사람들조차 난민으로 인정해야 하는 위험성이 생긴다는 설명이었다.
이에 키드 변호사는 지난해 12월 뉴질랜드 대법원에 항소했고 관련 심리가 현재 진행 중이다. 키드 변호사는 “기후 난민은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법률적 공백 지대에 있다”면서 “법정에서 해결이 되면 이 문제를 유엔으로 갖고 가 계속 문제 해결을 모색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후 난민 2050년까지 최소 2,500만명 발생 예상
영국 최대 기독교 구호단체 중 하나인 크리스천 에이드에 따르면 2050년까지 전세계에서 최소 2,500만명의 기후 난민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많게는 2억명에서 10억명까지 추산되기도 한다. 전세계 인구의 40%는 해안으로부터 100㎞ 이내에 살고, 1억명 정도는 해발고도 1m 이내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해수면이 상승하면 인간의 거주 환경은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테이티오타가 직면한 문제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우리와 결코 동떨어진 얘기들이 아니다. 조만간 우리 세대가 직면할 문제를 테이티오타가 먼저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는 점차 전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인구가 약 1만명인 투발루 향후 40년 이내에 전 국토가 바다 밑으로 가라 앉으며 지도 상에서 사라질 것으로 예상되고, 방글라데시는 국토의 60%가 해발 5m 아래에 있어 2050년까지 국토의 17%가 물에 잠길 것으로 전망된다. 호주 서부의 해수면 상승 속도는 전세계 평균의 2배 가량 수준을 보이고 있다.
선진국들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 수준을 올리고 있다. 주요 7개국(G7) 정상들은 지난 7일 독일에서 정상회의를 갖고 글로벌 탄소 배출을 2050년까지 지난 2010년 수준보다 40~70% 줄이기로 합의했다. 올해 말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기후변화협약당사국총회(COP21)에서는 2020년에 효력이 만료되는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후속 의정서도 채택할 예정이다.
하지만 당장 기후 난민을 인정하는 것조차 곤란해하는 선진국 등 많은 국가들이 실제 기후변화 문제를 적극 해결하려고 나설 지에 대해서는 비관론도 많다. 실제 이번 기후변화협약당사국총회에서 온실가스 감축량 합의가 성사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부정적 전망이 나오고, 일례로 우리 정부도 지난 12일 ‘2030년 온실가스 감축안’을 발표했는데 이는 지난해 1월 공표한 2020년 감축 목표보다 훨씬 후퇴한 것이어서 비판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테이티오타는 포린폴리시에 “기후변화로 많은 이들이 강제 이주를 강요당하고 있다”면서 “국제사회가 기후변화로 인한 심각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