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게이트의 윤곽이 드러나면서 대기업들이 권력에 속수무책으로 농락당한 실태도 속속 밝혀지고 있다. 2013년 말 청와대 수석은 CJ그룹 최고위 관계자와 전화통화에서 이미경 CJ 부회장의 경영 일선 퇴진을 요구했다. 그는 “너무 늦으면 난리 난다”면서 대통령(VIP)의 뜻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한다. 손경식 CJ 회장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에서 물러나라고 종용했다. 지난 대선 당시 CJ 방송 채널의 개그 프로그램이 박 대통령을 희화화한 걸 문제 삼아서 그랬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평창 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에서 물러난 내막도 말문이 막힌다. 조 회장은 지난 5월 김종덕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부터 “이만 물러나 주셔야겠다. 이유는 모른다”는 말을 듣고 다음 날 사퇴해야 했다. 최순실씨 회사에 평창올림픽 경기장 공사 일부를 주라는 요구를 거부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법정관리 중인 한진해운도 비슷한 맥락에서 희생양이 됐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은 지난 2월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수석으로부터 K스포츠재단에 대한 70억원 대 추가 기부를 요청 받았다는 얘기도 나왔다. 이 회장은 당시 “부당한 세무조사를 받게 됐다. 도와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한 것으로 드러났다. 삼성은 미르ㆍK스포츠재단에 204억원을 낸 것도 모자라 최씨가 독일에 설립한 비덱스포츠에 35억원을 추가로 돈을 댔다고 한다. 롯데그룹은 K스포츠재단 설립 당시 17억원을 낸 뒤에도 70억원을 추가로 냈다가 돌려받았다.
재벌 총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다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떤 형태로든 보복을 가하는 정권의 행태가 폭력조직을 닮았다. 군부정권이나 아프리카 독재국가에서 가능한 일이 작금 우리 주변에서 벌어진 것이다. 검찰 수사와 국세청 세무조사라는 막강한 칼을 쥔 정권에 어느 기업인들 옴짝달싹할 수 있을까. 정치권력의 약탈적 기업 갈취라는 후진적 행태는 이제 끝낼 때가 됐다. 기업도 검은 돈의 대가로 특혜를 바란 것에 대해 통렬한 반성이 필요하다. 차제에 한국 경제의 취약점인 전근대적인 정경유착의 고리를 확실히 끊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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