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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그럼에도 흔한 상황

입력
2017.10.08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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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의 응급실, 행동거지가 불안해 보이는 60대 남자가 내원했다. 방금 어떤 여자에게 목을 잡혀서라고 했다. 겉으로 외상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치료보다는 목을 잡힌 것이 분했고,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온 것 같았다. 흔한 일이다.

초진을 위해 여자 인턴이 다가갔다. 남자는 앞쪽 목에 상해를 입었다고 호소했다. 육안으로 환부를 관찰했으나 특별한 이상이 없었고, 촉진했을 때도 별다른 부종이 없었다. 기타 병력까지 확인하고, 인턴은 보고를 위해 자리를 뜨려고 했다. 남자는 돌연 인턴의 손목을 꽉 붙들어 자신의 목과 턱으로 가져갔다. “여기가 아프다니까. 여기 다시 만져보라고.” 남자가 두 손을 이용해 강제로 인턴의 팔목을 잡아 자신을 만지게 하는 모양새였다. 원치 않는 신체적 접촉을 당해 불쾌감을 느낀 인턴은 소리를 지르며 억지로 손을 뿌리쳤다.

의도와는 관계없이 성추행이기에 충분했다. 응급실에서는 이런 일을 더욱 엄중하고 단호하게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성추행 사건이 발생했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남자는 성추행을 한 바가 전혀 없노라 길길이 뛰었다. 경찰 두 명은 곧 응급실에 등장했다. 한 명이 의료진의 사정을 정리해서 들었고, 다른 쪽은 완력으로 날뛰는 가해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지했다. 우리는 차분히 방금 일어난 사실과,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게 적절한 처분을 원한다는 의사를 전했다. 남자는 자기가 손을 잡은 일도 없으니 CCTV를 돌려보면 되지 않겠냐고 발뺌하다가 결국 의료진에게 험한 욕설을 하며 완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제 이 사람이 응급실에서 욕설과 폭언을 하며 물리적으로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으므로 이는 명백한 현행법 위반이며, 방금 성추행과 더불어서 이것까지도 처벌을 원한다고 전했다. 연행이 필요한 사안이라고, 더불어 진료는 관련된 처벌 이후에 받아도 될 것이라는 소견까지 전했다. 경찰은 알겠다며 아직까지도 욕설을 하는 남자를 데리고 나갔다. 응급실 바깥에서 경찰과 남자는 실랑이를 하고 있었고,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나를 성 추행범으로 모는 나쁜 놈들”에 대한 욕이 들려왔다.

10분 뒤 경찰이 다시 들어와서 성추행을 당했던 인턴에게 말했다. “너무 사소하고 처벌하기도 애매한 사항이니 저희는 사건을 종결하고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가버렸다. 응급실 난동에 대한 설명을 원했던 나에게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욕을 하던 남자는 그냥 응급실 앞에 남겨졌다. 방금까지 우리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물리력을 행사하던 남자는 다시 들어와 앉았다. 이제 공권력이 떠난 응급실에서 그가 어떤 일을 벌일지 몰랐다. 생사를 오가는 환자의 보호자와 어린 자녀들 사이에 그가 앉아있는 꼴이 위태로웠다. 이번에는 내가 진료에 나섰다. CT를 찍어야 한다는 말에 또다시 화를 내며 돈이 없으니 진단서나 써달라고 하더니, 좀 있다가 그냥 응급실을 나가버렸다. 그날 밤 그에겐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은 셈이었다.

며칠 전 서울 한복판 응급실의 일이다. 의료진에게는 너무 흔한 상황이기에, 우리는 이 남자가 의미 있는 처벌을 받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남자가 명백히 성적 불쾌감을 주는 행동을 한 것은 맞았고, 재발을 막고 싶었으며, 생사가 오가는 응급실에서 다른 환자의 안위를 지키고 진료를 방해 받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이에 대한 증거와 정당한 처벌 의사를 확실히 밝혔으며, 적어도 연행이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우리가 얻은 교훈은 그 남자의 행동이 현재 우리나라에서 법적으로 충분히 용인된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권력이 무시하면, 의료진이 도움 받을 곳은 없다. 우린 그날 이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에 불과했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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