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내 아이돌의 젠더의식을 말하면서 팬질합니다”

입력
2016.08.10 17:24
0 0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빠순이’는 서럽다. 스타의 열혈 팬인 빠순이들은 누구를 열렬히 사랑하는 죄로 구박을 받기 때문이다. 종종 가수의 안전을 이유로 폭력을 행사하는 보안업체 직원들, 험한 욕설을 퍼붓기 일쑤인 매니저, 팬들을 고객이 아닌 ‘호갱’으로 보고 돈벌이에 혈안이 된 기획사까지 빠순이들을 만만하게 본다. 심지어 가족들도 “정신차리라”며 등을 돌린다.

하지만 빠순이는 강하다. 이들의 화력은 콘서트 표 판매와 음원 판매 실적 같은 숫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들은 사실을 왜곡하는 언론에 항의하고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방송국과 심의기관들에 정면으로 맞서기도 한다. 스타와 부당 계약을 맺고 착취했던 기획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빠순이는 진화한다. 이들의 칼 끝이 그동안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던 스타들을 직접 겨냥하고 있다. 지난 5월 발생한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팬덤 내부에서만 거론됐던 남성 스타들의 여성혐오적 이슈들을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성매매와 디시 JYJ갤의 박유천 지지철회 사건

지난 6월 17일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디시인사이드의 JYJ갤러리에 게재된 '최근 박유천 사건에 대한 DC JYJ 갤러리의 입장 표명’글. 디시인사이드 캡쳐
지난 6월 17일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디시인사이드의 JYJ갤러리에 게재된 '최근 박유천 사건에 대한 DC JYJ 갤러리의 입장 표명’글. 디시인사이드 캡쳐

지난 6월 17일, 그룹 JYJ의 인터넷 팬클럽 중 하나인 디시인사이드 JYJ 갤러리는 성폭행 의혹으로 경찰 수사를 받던 JYJ 멤버 박유천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이들은 JYJ갤러리에 ‘최근 박유천 사건에 대한 DC JYJ 갤러리의 입장 표명’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박유천을 지탄한다”며 “김재중, 김준수 두 사람만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들은 향후 박유천과 관련된 모든 활동이나 콘텐츠를 철저히 배격하기로 했다. 팬덤에서 가수에 대한 지지철회를 표명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JYJ 팬들은 2009년 그룹 동방신기의 멤버였던 김재중과 박유천, 김준수가 전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를 상대로 전속 계약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내고 법적 소송에 돌입했을 때 이들을 적극 지지해 온 버팀목이었다. 팬들은 광고와 토론회 등을 통해 동방신기가 SM과 맺은 13년의 장기전속계약과 지나친 사생활 통제, 불공정한 수익분배 등이 연예인에 대한 인권침해라는 주장을 펼쳤다. 11개국에서 8만6,000여명 팬들로부터 서명을 받은 탄원서도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출했다. 결국 법원은 이들의 전속계약일부 효력정지를 인정했고, 공정위는 2011년 연예인 인권상황과 계약조건 등을 고려한 표준전속계약서를 내놨다.

이처럼 JYJ를 밀어준 팬덤이 박유천에게 등을 돌린 것은 성폭행 혐의와 상관없이 성 매매 업소를 드나들며 팬들의 신뢰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팬들은 “부당함을 타파하려고 싸운 팬들이 성을 상품화 하는 곳에 출입한 박유천을 지지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룹 방탄소년단의 여성혐오적 가사와 트윗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요구하는 '방탄소년단 여성혐오트윗 공론화'계정. 트위터 캡쳐
그룹 방탄소년단의 여성혐오적 가사와 트윗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요구하는 '방탄소년단 여성혐오트윗 공론화'계정. 트위터 캡쳐

여성혐오 가사 문제제기한 방탄소년단 팬들

지난달 그룹 방탄소년단의 팬들은 여성혐오적 가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룹 멤버인 랩몬스터가 지난해 3월 공개한 ‘농담’이라는 곡이 여성에 대한 폭력적 가사를 담고 있고, 2013년 그룹이 부른 노래 ‘미스라이트’ 에서도 여성비하적 시선이 드러난다는 지적이었다. (기사보기)

팬들은 지난 5월 트위터에 아예 ‘방탄소년단 여성혐오트윗 공론화’(@bts_female_fan1) 계정을 만들어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젠더적으로 문제있는 콘텐츠를 계속 즐기고 재생산한다는 생각에 너무나 죄책감이 들었다”고 밝힌 팬들은 “더 이상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제대로 된 답변을 받기로 했다”며 소속사의 입장 표명을 요구했다. (기사보기)

결국 방탄소년단의 소속사 빅히트엔터테인먼트는 언론에 보도되는 등 문제가 커지자 지난달 6일 인터넷 팬 카페에 사과문을 올려 “가사를 재검토한 결과 일부 내용이 창작 의도와 관계없이 여성 비하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 있고 불편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며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지난 5월 18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시민들이 살인사건에 희생된 여성을 추모 하는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5월 18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시민들이 살인사건에 희생된 여성을 추모 하는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내 아이돌의 젠더의식을 얘기하면서 팬질합니다”

팬덤의 칼 끝이 스타를 겨냥하기란 쉽지 않다. 스타에 대한 사랑으로 모인 집단인 만큼 최우선 가치는 ‘사랑하는 스타의 행복’이다. 여기에 방해되는 장애물은 배척 대상이다. 주로 편파적이고 악의적 보도를 한 언론, 부당 계약으로 괴롭히는 기획사, 때로는 사생활을 침해하는 ‘사생팬’과 악성 루머를 퍼뜨리는 ‘악개’(악성 개인팬) 등이 여기 해당한다.

반면 스타에 대한 비판과 팬들이 받는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는 ‘스타를 욕 먹이면 안된다’는 분위기 때문에 좀처럼 공론화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회 전반적으로 인권 의식이 성장하고 10대 여성이었던 팬덤의 중심이 20,30대로 넘어가면서 상황이 바뀌고 있다.

지난 4월부터 거론된 보안업체 시큐리티 사태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큐리티는 방송 녹화장이나 공연장에서 팬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당시 SM 소속 그룹 엑소의 공연을 보러 간 한 여성팬이 보안요원에게 “가슴에 카메라를 숨기고 들어올지 모르니 가슴을 만져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트위터에 글(기사보기)을 올렸다. 지난달에는 팬들에 대해 폭언과 폭행을 서슴치 않는 ‘시큐리티 갑질’ 사례를 모으는 운동이 온라인에서 전개되고 있다.

여기에 지난 5월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은 상당수가 여성인 아이돌 팬들에게 그들이 소비하는 가수와 관련 콘텐츠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방탄소년단 여성혐오 트윗 공론화 계정을 운영한 팬들은 웹진 아이돌로지와 인터뷰에서 “추모를 위해 강남역에 갔다가 같은 목적으로 찾아온 다른 팬들을 만났다”며 “사회 전반적으로 여성혐오 이슈가 불거지지 않았다면 방탄소년단의 가사 문제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들의 문제제기가 전체 팬덤의 목소리는 아니다. 디시인사이드 JYJ갤러리의 박유천 지지철회 이후 디시인사이드 박유천 갤러리를 비롯한 해외 팬연합은 성폭행 혐의와 관련해 추측성 보도를 삼가하라는 박유천 지지성명을 내 놨다. 방탄소년단 여성혐오 트윗 공론화 계정 운영자들도 다른 팬들로부터 ‘아이돌을 이용해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려 한다’는 공격을 받았다. 이에 대해 방탄소년단 여성혐오 트윗 운영자들은 “내 안에 빠순이 특성이 있고 페미니스트 특성도 있다”며 “(트윗에 반대하는 팬들 사이에) 오빠 위에 페미니즘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결국 빠순이는 오빠 밑에 있는 존재라는 인식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빠순이의 변화는 멈추지 않는다. 박유천의 성폭행 의혹은 경찰 조사결과 무혐의 처리됐지만 디시인사이드 JYJ갤러리는 기존 입장을 뒤집지 않았다. 다른 아이돌 팬들도 방탄소년단 팬들처럼 추앙하는 스타의 젠더 의식을 고민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웹진 아이돌로지의 미묘 편집장은 “방탄소년단은 올해 발표한 앨범 초기부터 가사에 여성혐오적 내용을 걸러 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며 “아이돌 팬들의 상당수가 여성인만큼 젠더 문제는 더욱 민감한 화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 (1) "남자들의 수다에 '음담패설' 꼭 끼어야 하나요"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