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슬리퍼 들고 면접 배틀 장면은
가장 고민 많았고 힘들었던 순간
영화까지 5개월간의 장그래 연기
제 자신에게 80점은 주고 싶어요"
드라마의 단독 주인공을 처음 꿰찬 2년 차 배우에게 40분 분량의 프레젠테이션(PT) 장면이 주어졌다. 중간에 끊김 없이 ‘원 테이크’ 기법으로 촬영해야 하는,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장면. 드라마의 성패가 이 한 장면으로 갈릴 수도 있다. 고작 다섯 편의 드라마에 출연했고 그 중 비중 있는 연기를 한 것은 한 편에 불과한 신인에게는 숨이 막힐 정도의 압박이었다. 대사도 많고 동료 배우와의 호흡도 중요하다.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것 같은 부담이 엄습했다. 잠을 미루고 상대 배우와 함께 대사 연습을 하며 밤을 새웠다.
tvN ‘미생’에 계약직 사원 장그래로 나와 신드롬을 일으킨 임시완(27) 얘기다. 드라마에서 장그래는 사무직 사원을, 한석율(변요한)은 작업현장(공장) 사원을 각각 대변하는 PT로 물러서지 않는 면접 대결을 한다. 물건을 팔아보라는 면접관들의 요구에 장그래는 오 차장(이성민)의 슬리퍼를 들고 직원들의 노력과 땀에 대해 이야기한다. 장그래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낸 이 장면을 놓고 임시완은 “고민을 가장 많이 하고 힘을 가장 많이 쏟아 부었다”며 “하기 힘들었던 신(scene)”이라고 말했다.
임시완은 아이돌그룹 제국의아이들의 멤버로, 4년 차 가수이기도 하다. MBC ‘해를 품은 달’(2012), KBS ‘적도의 남자’(2012)에서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며 드라마에 발을 디뎠다. 시트콤과 단막극도 경험했지만 드라마에서 연기다운 연기를 한 건 이범수, 김재중과 삼형제로 나온 MBC ‘트라이앵글’(2014)이 전부다.
그런 임시완이 지금은 신드롬의 주인공이 됐다. 26일 기자간담회에 취재진 100여명이 몰린 것은 그 때문이다. 이날 임시완은 포상휴가를 막 다녀온 길이었다. 드라마를 끝낸 소감은 어떨까. “제가 드라마에서 맡은 장그래와 원작의 장그래가 싱크로율 100%라고 생각해요. 드라마 ‘미생’으로 4개월, 영화 ‘미생 프리퀄’까지 합치면 5개월을 장그래로 살았어요. 제 자신에게 80점은 주고 싶어요.”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연기에 고민이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미생’은 사실적인데다 현실과 맞닿은 부분이 많아 연기할 때 숨쉴 틈이 없었어요. 점심 시간에도 쫓기며 연기하다 보니 ‘밑천이 다 드러나겠구나’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한계를 많이 느꼈어요. 단순하게 다가가서는 안 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다가 ‘나 역시 미생이구나’하고 느꼈습니다.”
임시완 역시 가수 데뷔 전 연습생 생활을 하며 고비를 넘겼다. “열심히 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장그래가 했던 생각을 저도 연습생 때 했어요. 그런데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정의를 외면하고 눈치를 봐야 할 때도 있었어요.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못할 때는 힘들었어요.”
그런 임시완을 두고 ‘미생’의 김원석 PD는 “20대 배우 중 임시완처럼 연기력을 갖춘 배우는 흔치 않다”고 했고 오 차장 역의 배우 이성민은 “장그래 역에 탁월한 캐스팅”이라고 평가했다. 임시완은 “‘미생’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여서 평범한 사람을 필요로 했던 것 같다”고 쑥스러운 듯 말했다.
요르단에서 촬영한 엔딩 장면에서 장그래는 제품 샘플을 가지고 도망치는 거래처 직원을 잡기 위해 추격전을 하고 그러다 차에 부딪힌다. 스턴트맨이 사고 장면을 대신 촬영했지만 장그래는 이제껏 보여주었던 계약직 사원이 아니라 슈퍼맨처럼 마지막 회에 등장했다. 임시완은 “장그래가 처절하고 안타까운 현실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라며 “사람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장그래를 떠나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작 임시완은 장그래도, ‘미생’도 떠나 보내기 쉽지 않은 듯 했다. “2014년은 너무 많은 것을 받은 해”라면서 “이렇게 많이 받을 시기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절대 다수의 시청자가 장그래였기 때문에 저를 공감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미생이지요. 저는 제가 바둑에서 꼭 필요한 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가수로 데뷔했을 때보다 지금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안도감이 생겼습니다. 만약 제가 필요하지 않은 때가 오더라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은영기자 kis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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