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16일, 30여개 주요 신문의 1면에 ‘그 어떤 사죄의 말씀도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습니다’라는 헤드라인의 사과광고가 일제히 실렸다.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이 여론의 성토 대상이 되자 대항항공이 집행한 광고이다. 본문의 내용을 들여다 보자.
‘최근 대한항공의 일들로
국민 여러분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실망감을 안겨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커다란 사랑을 주신 여러분께 큰 상처를 드렸습니다.
그 어떤 사죄의 말로도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국민 여러분의 질책과 나무람을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다시금 사랑 받고 신뢰받는 대한항공이 되도록
환골탈태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새로운 대한항공이 되겠습니다.
대한항공’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떤 조치를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한 마디도 없다. 게다가 사과의 주체는 잘못한 장본인인 조현아 부사장이 아니라 대한항공 법인이었다. 30여개 신문에 광고를 하려면 광고비 7~8억원은 들었을 터, 못돼 먹은 재벌 3세의 잘못을 회사 비용을 들여 사죄하고 나선 꼴이다. 저 광고를 만든 광고대행사는 말단 카피라이터부터 사장까지 사과 아닌 듯한 사과문을 만드느라고 밤을 새웠을 것이다. 담당 카피라이터는 조사 하나, 단어 하나를 고르고 골라 만들어낸 사과문이 고작 저것이었으니 신문에 내고도 ‘내가 이러려고 카피라이터를 했나…’ 하는 자괴감에 심각하게 이직을 고려했을지도 모르겠다.
최순실게이트로 불리는 요 며칠의 엄청난 뉴스들에 대해 사과하는 대통령의 담화를 보면서 대한항공의 지난 사과광고가 생각났다. 잘못한 재벌이나 잘못한 대통령이나 그들의 사과에는 진정성이 빠져 있다. 대통령은 말했다. 모든 잘못은 특정 개인의 위법행위일 뿐이고 본인은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의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바람에서 추진’한 일이었다고. ‘앞으로 사사로운 인연을 완전히 끊고 살겠다’고. 대통령의 말은 본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국민이 바라는 것이 무언지 전혀 모르고 있거나,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말로 들렸다. 이런 소리나 들으려고 아침부터 TV를 켜고 귀를 기울였나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사과 받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는커녕 이러다 또 흐지부지 넘어가는 것 아닐까 의구심이 생겼다. 이 담화문은 누가 썼을까. 어쩌면 치밀한 정치적 계산이 깔린 아주 잘 쓴 담화문인지도 모르겠다.
사과 받는 사람이 진심으로 수긍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사과광고는 불가능한 것일까. 일본 빙과업체 아카기유업의 사과광고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지난 4월 아카키유업은 자사의 아이스바 ‘가리가리군’의 가격을 25년 만에 개당 60엔에서 70엔으로 10엔 올렸다. 재료비와 인건비 상승을 이기지 못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지만 그냥 넘어가지 않고 신문과 TV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사과했다. 사과의 TV 광고는 코믹하면서도 구슬픈 CM송 ‘물가인상’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가격을 인상하고 싶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인상을 보류하고 싶어”라는 가사가 흐르는 동안 사장과 100여명의 직원들은 두 손을 모으고 비장하게 서있다. 그리고 가격 인상을 단행한다는 대목에 이르면 허리를 깊이 숙여 사죄를 표현한다. 고개 숙인 직원들의 머리 위로 “25년간 버텼지만 결국 가격을 인상하게 됐다”라는 자막이 보인다. 이 광고가 나가고 해당 아이스바의 매출은 전년 대비 150%나 늘었다고 한다. 25년간 가격을 동결한 노력과 피치 못한 가격 인상을 소비자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인 결과다. 부러웠다. 한 때 CF 잘 만드는 것으로 명성을 날렸던 차 감독이 실력을 발휘하면, 우리 대통령도 아카기유업의 사과광고보다 훨씬 더 감동적인 사과 영상을 만들 수 있을 텐데…. 부질없는 망상으로 또 하루 불면의 새벽을 맞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gUZooUDRQ2A (아카기유업 사과광고_TV-CM 링크)
아카기유업 사과광고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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