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로 亞 전통문화 급격 소멸
문화유산 정체성 지키려 더 노력
유럽 등에선 최근에야 관심
한국의 ‘인간문화재 제도’ 모방
유네스코, 회원국에 설치 권고도
‘무형문화재’라는 개념은 아시아에서 탄생했다. 일본이 1950년 문화재 보호법을 실시해 세계 최초로 무형문화재 보호에 나섰고, 1962년 한국이 뒤를 이었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협약이 제정된 2003년보다 반세기나 앞선다. 국제사회에서 문화재의 범위를 무형문화유산으로까지 확대하게 된 추동력은 문화를 생활전통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아시아 등 제 3세계 회원국들에게서 주로 나왔다. 서구의 무형문화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어 ‘무케이 분가자이(無形文化財)’의 느슨한 번역어였다. 유네스코가 한국의 ‘인간문화재’ 제도를 본 따 1993년 회원국들에게 ‘인간문화재(Living Human Treasures)’ 제도 설치를 권고한 사례는 한국 무형문화재 제도가 당시에는 선진적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무형문화유산의 정치학
역사적으로 서구에서는 전통문화 계승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데 반해, 비서구 국가는 서구화와 다름 아닌 산업화를 거치며 전통문화가 급격하게 소멸하거나 변형됐다. 그 현상은 유형문화유산보다 무형문화유산에서 더욱 급격하게 일어났다. 이에 비서구 국가는 사라져가는 자신들의 문화를 보존함으로써 서구에 대항해 독자적인 가치를 내세우려 했다. 한국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민속학자 정수진이 쓴 ‘무형문화재의 탄생’(역사비평사 발행)에 따르면, ‘한국적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조국 근대화를 주창했던 박정희 정권은 문화재 정책을 수립함으로써 국민 동원 체제에 민족주의적 정당성을 제공하고 홍보하는 효과를 노렸다. 한국 사회에서 무형문화재란 민족 정체성의 결정판이며,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는 그 정체성을 ‘인증’받는 것으로 여겨지게 됐다.
유네스코가 한국과 중국, 일본의 각축장이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ㆍ중ㆍ일 3국은 같은 문화권 안에서 오랜 시간 많은 것을 공유해왔다. 그에 따른 역사분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자국의 유산을 먼저, 더 많이 등재시킴으로써 원조의 이미지는 물론 자국의 역사적 해석을 확산시키는 국제정치적 지렛대로 무형문화재를 활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형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서구의 태도는 어떨까. 영국의 사례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협약 회원국에서 영국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대해 민속학 교수 A씨는 “영국은 산업화의 종주국이다. 결국 근대화의 역사는 영국의 생활양식이 전 세계로 수출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무형문화유산에 가입하지 않는 것은 굳이 제도나 법을 만들면서까지 무형문화를 보존할 필요가 없다는, 영국의 굉장한 자부심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모든 서구 국가가 영국과 같은 태도를 지닌 것은 아니다. 2003년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협약이 체결된 후 유럽도 점차 무형문화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2006년 협약 비준 후 2011년 무형문화재 보호를 위한 ‘프랑스 무형문화유산 센터’를 창설했다. 독일도 2013년 협약에 가입한 뒤 2년에 걸쳐 국내 무형문화유산을 조사해 이듬해 12월 처음으로 무형문화유산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럽의 무형문화유산 보호 및 관리 방식은 한국과 차이가 있다. A교수는 “한국의 경우 국가가 직접 개입하고 후계자를 지정하지만 유럽은 마이스터 등으로 불리는 장인들에게 훈장이나 상을 주는 식으로 운영 방식이 조금 다르다”며 “관심도로 따지면 동아시아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문화는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는 데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불리는 ‘대표목록’ ▦위기에 처한 유산을 모은 ‘긴급보호목록’ ▦협약의 원칙과 목적에 잘 부합하는 보호사례를 정리한 ‘모범사례목록’이다. 유네스코가 무형문화유산 협약을 체결한 이유는 소멸위기에 놓인 무형문화유산을 보호해 인류의 문화적 다양성을 수호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협약의 궁극적인 취지는 긴급보호목록과 모범사례목록 작성에 있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주요 당사국들은 협약의 취지가 무색하게 상대적으로 등재가 쉬운 대표목록에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올리는 데 힘을 쏟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경향은 현재까지 유네스코에 등재된 무형문화유산 470건 가운데 대표목록이 399건에 달하는 것만 보아도 확인된다. 특히 한ㆍ중ㆍ일 상위 3개국은 112개국이 등재한 대표목록 399건 가운데 약 18%에 이르는 71건을 점유하고 있다. 중국이 가장 많은 31개를 대표목록에 올려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어 일본이 21개로 2위, 한국이 19개로 3위다.
반면 무형문화유산 협약의 취지가 잘 반영된 사례로 꼽히는 모범사례목록은 19건 가운데 12건이 유럽국가다. 한ㆍ중ㆍ일 가운데 모범사례에 등재된 국가는 중국, 그것도 1건뿐이다. 적극적으로 무형문화유산을 관리하는 한국 정부가 ‘무형문화유산 선진국’을 자처하면서도 모범사례에는 들지 못한 것은 아쉬운 지점이다. 이에 대해 유네스코 관계자는 “회원국은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을 할 때 어떤 목록에 지원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데 동아시아 국가들은 거의 대표목록에 신청하는 반면 유럽 국가들은 비교적 모범사례에도 적극적으로 신청한다”며 “유럽에서는 대표목록 작성이 문화의 서열화를 야기한다는 비판적인 시각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유네스코가 말하는 모범적인 무형문화유산 보호란 어떤 것일까. 스페인은 대표목록 13건과 모범사례 3건, 벨기에는 대표목록 11건과 모범사례 2건을 등재했다. 스페인과 벨기에의 모범사례가 가지는 공통점은 ‘문화 당사자들의 적극적인 보호활동’이다.
2009년 가장 먼저 모범사례로 등재된 스페인의 ‘푸솔 학교 박물관의 교육 프로젝트’는 1명의 교사로부터 시작됐다. 푸솔 학교의 교사 페르난도 가르시아-폰타네는 1968년 농업의 기계화로 엘체 지역의 교외 지역에서 사회적ㆍ환경적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고, 학교의 교육과정에 지역의 전통과 자연 환경에 대한 내용을 도입했다. 지역 사회는 학교의 노력을 인식해 적극 지원했고, 그 결과 ‘농업학교 박물관’이 세워졌다. 이후 프로젝트의 인지도는 높아졌고 기부는 더욱 증가했다. 지방 정부는 박물관을 공식 승인하는 것은 물론 학교에 관련 교육 인력을 추가 지원하기도 했다. 유네스코는 프로젝트가 “지역사회, 집단, 그리고 여러 개인들(전통의 전수자ㆍ지역 지도자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지지하지 않았다면 발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관련 공동체의 적극적인 참여를 높게 평가했다.
2011년 모범사례로 선정된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역의 전통 놀이 보호’ 사례도 마찬가지다. 비정부기구인 ‘스포르티모니윔’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 플랑드르 지역 23개 종목의 전통 놀이를 보호하기 위해 지역 사회 및 협회와 협력해 보호 조치를 취했다. 관련 실무자는 물론 동호회와 연맹의 상호접촉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 1988년 ‘전통 놀이 연합’을 창설했다. 이들의 협력으로 연합 회원은 500명에서 1만2,500명으로 꾸준히 증가하기도 했다. 유네스코는 이들의 활동이 “놀이를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형문화유산이 문화적으로 중요하다는 인식을 확대하는 것”을 돕고, 이 점이 문화 보호 전략의 핵심으로 작용했다고 봤다. 무형문화유산 보호가 당사자들의 자발적 참여보다는 국가의 관리에 의존해 이뤄지고 있는 한국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한국에도 모범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임돈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사학과)는 ‘강릉 단오제’를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 보호 기조와 가장 잘 부합하는 사례”로 꼽았다. 유네스코는 무형문화재 보호를 ‘공동체(커뮤니티)’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가급적 문화와 관련된 당사자들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주도적으로 계승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지자체가 인위적으로 만든 축제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가 금세 사라지는 것과 달리, 강릉 사람들은 강릉 단오제에 매우 큰 자부심을 느끼며 흥겹게 축제에 참여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유지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네스코 등재를 통해 우리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것이 기분 좋은 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진짜 우리 것을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데 보다 의미 있는 등재는 어떤 등재인지 되돌아볼 시점이다.
오희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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