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북한의 4차 핵실험 직전 북한과 비공식 접촉해 평화협정 등을 논의한 사실이 미 언론에 보도되면서 한반도 주변국들이 유엔 대북 제재 이후 국면을 내다본 수 싸움에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우리 정부가 대북 제재 일변도의 강공 드라이브만 걸 경우 자칫 북핵 외교에서 주도권을 잃고 소외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22일 월스트리트저널(WSJ) 및 우리 당국자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북한은 지난해 10월 1일 리수용 외무상의 유엔총회 연설을 기점으로 집중적으로 평화협정 협상을 제안한 후 북한의 유엔대표부를 통해 미 국무부에 의사를 타진했다. 국무부는 북한의 제안을 검토한 후 그런 논의에 비핵화 의제가 포함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으나 북한이 이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 논의가 무산되긴 했지만, 미국이 그간 북한의 ‘선(先) 비핵화’를 강조해왔던 데서 비핵화와 평화협정 협상을 병행할 수 있다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이는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최근 비핵화와 평화협정 협상을 병행하자고 제안한 것과 공명하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 당국자는 “지난해 말 미북 접촉은, 의미 있는 6자 회담 재개를 위해 우리 정부가 제기했던 ‘탐색적 대화’의 일환으로 이뤄진 것”이라며 “미북이든 남북이든 다자든, 전제 조건 없이 다양한 형태의 탐색적 대화를 추진해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하자는 5자간 공감대가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이 평화협정 논의가 아니라 비핵화 의지를 확인하기 위해 북한과 접촉했으나 북한이 ‘핵보유국 인정’을 고집하면서 소득 없이 끝났다는 설명이다. 특히 4차 핵실험 후 한미가 대북 제재에 집중하는 현 국면에선 아무 의미 없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말의 북미 접촉이 갑작스럽게 보도돼 평화협정 논의가 수면 위로 오른 배경을 두고 미 정부 내 대화론자들이 제재 국면 이후를 내다보면서 협상의 포석을 던진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실제 WSJ 보도는 미 정부 고위 관료가 “북한은 상업적 활동이 왕성한 이란과 다르다”고 말했다면서 이란식 대북 제재에 한계가 있다는 미 정부 내 회의적 시각을 소개하고 있다. 제재 중심의 강경파와 이견을 보이는 대화론자들이 미북 접촉 사실을 흘려 평화협정 의제를 띄웠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외교 소식통도 “지난해 연말 미 정부 내 대화론자들은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같이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는데, 북한의 입장 변화가 없어 난항을 겪었다”고 전했다.
이는 ‘비핵화ㆍ평화협정 동시 논의’가 유엔의 대북 제재 이후 국면에서 북핵 협상을 여는 불쏘시개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특히 비핵화ㆍ평화협정 협상 병행을 제안한 중국이 유엔 대북제재 결의에 협조하는 동시에 이를 지렛대로 대화 국면을 열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중국과 일본은 북핵 문제를 논의하는 고위급 협의를 이달 중 개최하기 위해 조율 중이라고 일본 교도 통신이 이날 보도했다.
물론 북한이 비핵화 의사가 없고 미국도 대선 국면에 본격 돌입해 획기적인 대화 국면이 조성되기 어렵다는 의견은 여전하다. 외교부는 “지금 대화를 말하는 것은 북한에 잘못된 메시지를 주는 것”이라고 경계하지만, 북한이 5월 당 대회 이후 중국의 지원을 받아 대화 공세에 나서고 미 정부 내 대화파가 주도권을 가지면 강경 일변도의 우리 정부만 난처한 입장에 빠질 수 있다. 통일부가 이날 “평화협정은 미국과 북한간 문제가 아닌, 한국이 주도적으로 주체가 돼야 한다”고 입장을 밝힌 것도 갑작스런 북미 대화 가능성을 견제한 것으로 분석된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배치 문제도 미중 협상 테이블에 오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우리 정부가 외교 전략 없이 접근하다가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송용창기자 hermee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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