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하’ ‘위 아 영’ 근래 ‘미스트리스 아메리카’까지, 뉴욕 3부작이라고 불리는 노아 바움백 감독의 영화는 국내에서도 소소하게 주목 받아왔다. 바움백이 주목하는 캐릭터는 희소한 취향을 언급하길 즐기고, 위트와 위험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냉소 가득한 말들을 내뱉는 뉴욕의 문화예술계 종사자다. 그래서인지 ‘바움백 월드’를 관람한 이들은 예술가적 자아를 탁월하게 뽐내는 주인공과 그를 부러워하는 인물의 묘한 긴장감을 특색으로 꼽는다.
하지만 나는 다른 지점에서 바움백의 영화가 흥미롭다. 먼저 그의 작품에는 ‘타임 푸어time poor’가 된 젊은이들이 강조된다. 바움백 영화의 뮤즈인 배우 그레타 거윅은 영화 속에서 늘 바쁜 인물을 연기한다. 허나 우린 눈치 채고 있다. 바쁨이란 정말 바쁜 게 아니라, 제대로 진행되는 일이 없거나 정작 하는 일이 없다는 뜻임을. 그녀가 맡은 인물은 대체로 ‘쩌는 활동성’을 지녔지만, 그 에너지는 일의 구상 단계에 쏠린다. 거윅을 비롯해 영화 속 인물들은 ‘이상’을 품는 게 얼마나 손해인지 미리 자각하면서도, 사회가 자신들에게 늘 ‘구상’중인 인간임을 확인하려 드는 것에 지쳐 있다.
이 문제를 현실과 견주어볼 때, 마치 공모전 준비 태세를 상시적으로 요구 받는 우리네 젊음과 이어진다. 바움백의 영화엔 구상을 경제적으로 실현시킬 사람을 정하고자 자신의 신체 감각을 프레젠테이션에 맞춰놓은 이들이 곧잘 등장한다. 젊은 문화노동자들의 비애를 보여주는 거윅은 ‘프로젝트식 삶’을 따른다. 그녀는 일의 성과가 주는 효과와 쾌감이 짧을지 길지 불확실한 가운데, 이 불안한 현실을 ‘쿨하게’ 인정할 줄 아는 동료를 찾는다. 하지만 이러한 쿨함은 본연의 마음이기보단, 프로젝트식 삶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자 단련한 자아상에 가깝다.
새삼스럽지만 그간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삶의 일시성을 요구해왔다. 이러한 일시성이 ‘안전한 비정규직’이란 모순을 만들었음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여기서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젊은 세대가 공모전을 삶의 단위로 받아들이도록 신자유주의가 유도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모전이란 실제 대회나 경연이라고만 할 수 없다. 이른바 ‘공모전 자아’를 갖게 된 젊은이들은 가상의 사원(社員)이 되어 직업에 대한 지식을 얻음과 동시에 노동에 대한 환멸을 자주 체험한다. 피로와 냉소가 누적되는 가운데, 소진(burn-out)은 일에 파묻힌 채 성과에 중독된 직업인의 경험만이 아니라 직장 문을 두드리기 전부터 청춘의 체내에 침투한 바이러스와도 같다.
바움백의 영화는 공모전 자아라는 신자유주의의 심성 전략을 보여주면서 소진에 찌든 젊음이 찾는 위안이자 방어책이 ‘빈정거림’임을 시사한다. 지치면 예민해진다. 예민해지면 자신도 모르게 빈정거림이 새어 나온다. 거윅이 맡은 20대 무용수 프랜시스(‘프랜시스 하’), 레스토랑 창업을 꿈꾸는 30대 프리터 브룩(‘미스트리스 아메리카’)은 따가운 말로 주변인에게 상처를 주기 일쑤다.
하나 영화는 이러한 빈정거림을 개인의 기질에 두지 않는다.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라는 시간 규격을 택하지 않은 영화 속 젊은이들은 일이 곁을 따라다닌다는 말로 본인을 방어하면서, 존재에 대한 불안을 빈정거림으로 푼다. 바움백 영화의 중요한 특징인 이 빈정거림은 취향의 문제로 이어진다. 한데 여기서 취향이란 굉장한 문화적 섭식력을 자랑하는 표현이 아니라, 불안한 노동 환경이 주는 피로에 은근히 신경질 나 있다는 표식에 가깝다. 물론 바움백의 영화도, 극장 밖 현실도 빈정거림과 취향을 온전한 해결책으로 제시하진 않는다. 이를 영화 안팎에서 확인한 우리가 취할 태도는 낙심밖에 없는 것일까. 해외 평단에서 바움백의 영화를 “실망 3부작”으로도 불렀다는 걸 알고 나서 마음이 더욱 스산해지는 건 왜일까.
김신식 김샥샥연구소장ㆍ독립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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