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36.5도] "사이다 좀 주소"

입력
2016.07.28 20:00
0 0
케이블채널 OCN의 드라마 '38사기동대'는 세금징수원과 사기꾼의 콜라보를 통해 통쾌함을 연출해낸다. OCN 제공
케이블채널 OCN의 드라마 '38사기동대'는 세금징수원과 사기꾼의 콜라보를 통해 통쾌함을 연출해낸다. OCN 제공

현실을 반영한 TV드라마나 영화를 보다 보면 고구마와 사이다 먹기를 반복하는 기분이다. 화면 밖에서 마주칠지도 모를 거악의 횡포에 가슴이 답답하다가도 주인공이 정의를 실현해 낼 때 속이 뚫린다.

요즘 즐겨보는 케이블채널 OCN의 ‘38사기동대’도 가슴 체증과 청량감을 함께 안기는 사회비판적 드라마다. 뻔뻔한 고액 탈세범들의 주머니를 털어내는 주인공들의 분투가 짜릿하다. 그런데 이 드라마 좀 수상하다. 세금 징수 공무원 백성일(마동석)과 젊은 사기꾼 양정도(서인국)가 ‘결탁’해 탈세범들을 속여 세금을 징수한다. 공무원과 사기꾼이 손을 맞잡고 사회정의를 실현한다는 황당무계한 설정은 한국사회의 고질에서 힌트를 얻었다.

백성일이 동료들과 미납 세금을 징수하려 할 때마다 탈세범은 권력을 방패 삼는다. 지역 유지가 된 탈세범은 경찰서장이나 시 고위직뿐 아니라 시장의 비호를 받는다. 시장은 탈세범의 후원으로 권력을 누리고 있고, 시의 요직도 시장에게 줄을 댄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탈세범을 건드리면 시장이 기침을 하고, 시 직원들이 감기몸살에 시달리는 연쇄 작용이 발생한다. 세무서 직원들이 탈세범들 앞에서 기를 못 펼 수밖에 없다. 공조직이 부패사슬에 휘감겼으니 송사리 같은 서민만 법대로 징수 대상이 된다. 거물 탈세범을 농락하며 세금을 받아내려면 결국 지능적 사기 기법을 동원할 수밖에. 강직하나 물정 모르는 공무원 백성일이 닳고닳은 사기꾼 양정도와 손을 잡은 이유다. 제목이 서울시 세금 징수팀 38기동대에 사기를 합성한 '38사기동대'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사기를 치게 된 백성일의 활약은 성경을 읽기 위해 초를 훔친 행위에 버금갈 정도로 모순됐다. 하지만 ‘38사기동대’는 얼음을 잔뜩 띄운 음료수 한 컵을 단숨에 들이켜는 듯한 쾌감을 선사한다. 사기꾼의 힘조차 빌리지 않으면 사회 비리에 칼을 댈 수 없다는 점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니까 발생하는 카타르시스다.

'38사기동대'는 우울하게도 우리가 처한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뿌리부터 썩어 줄기까지 죽어가는 나무처럼 부패하고 무기력한 공직사회를 과장되게 은유한다. 드라마는 현실을 닮아가는데 현실은 드라마에서 아무 교훈도 얻지 못하는 듯하다. 백성일 등은 편법을 써서라도 공익을 위해 애쓰는데 현실의 고위 공무원은 무사안일과 복지부동을 넘어 자기 몫 챙기기에 바쁜 모양새다. 시장 당선을 위해 또는 자리 보전을 위해 검은 돈의 힘을 빌린 ‘38사기동대’의 소극적 악인들은 그나마 양질이다. 권력과 공직을 통해 다져진 인맥을 재테크 수단으로 십분 활용한 검사와 검사 출신 법조인의 탐욕은 드라마 속 악인들도 혀를 찰 지경이다. 드라마는 청량한 사이다를 곁들여주는데, 현실은 고구마만 연신 먹이는 꼴이다.

드라마 뺨치게 부조리한 현실을 지켜보다 보면 법은 약하고 선한 사람들만을 구속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38사기동대’의 탈세범들은 가난하지만 법과 원칙을 지키는 소시민들을 조롱하고 윽박지르며 돈으로 형성한 힘을 종종 과시한다. 드라마 속 탈세범들의 뻔뻔한 모습이 현실과 공명한다.

무더위 속 불쾌지수를 한껏 높이는 건 고위 공직자의 비리만이 아니다. 비리를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거나 의혹은 의혹일 뿐이라고 일축하는 최고권력자의 입장을 접할 땐 체감온도가 2℃ 가량 오른다. 국민들의 냄비근성을 악용한다는 비판도 있었으나 과거의 권력자들은 비리의 고리가 발견되면 겉으로라도 단호한 대처를 외치며 관계자들의 사표를 받았다. 사회를 발전시킬 거시적인 처방이라 할 순 없어도 국민들은 시원한 기분이라도 느낄 수 있었고 정부에 작은 기대라도 걸었다.

1970년대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유에 목말랐던 가수 한대수는 “물 좀 주소”라고 외쳤다. 세월이 흘러 고구마만 먹는 듯 답답한 일상을 보내야 하는 요즘 국민들은 이렇게 외치고 싶지 않을까. “사이다 좀 주소.”

라제기 엔터테인먼트팀장 wender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