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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남자가 무슨 성적 수치심? “우리도 불편해 배려받고 싶어요”

입력
2018.01.17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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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 청소 아줌마 불쑥

여선배가 회식 때 볼 뽀뽀

병원 등서도 수치심 ‘속앓이’

남성들, 약한 모습 노출 꺼리고

남자다움 유지 못할까 불안 내재

불편함 말로 표현도 잘 못해

서울의 한 홍보대행사에서 일하는 홍보맨 박종혁(33ㆍ가명)씨는 볼 일 보러 화장실에 갈 때마다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청소원 아줌마가 있는지 여부를 살피는 것. 아무리 삼십을 넘긴 나이라지만 볼일 보는 바로 옆에 여성이 있다는 게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지난달엔 대변을 보다가 물벼락을 맞았다. 청소원 아줌마가 바닥 청소를 한다고 사람이 안에 있는 줄도 모르고 냅다 물을 퍼부었던 것. 참다못해 대들었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까지 받았다. “화장실 청소, 아무도 없을 때 하면 안돼요?”라고 따졌더니, “난 암 것도 못 봤다구. 거 이상한 양반이네! 내 나이가 환갑이야~”라며 몰아세웠다.

박씨는 “아마 남성 청소원이 여자 화장실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난리가 날 것”이라며 “여성만 성적으로 보호받을 권리가 있느냐”라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박씨의 하소연처럼 성적 수치심은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하지만 남성의 성적 수치심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 탓에 남자 화장실의 ‘여성 청소원’처럼 잘못된 관습 속에서, 혼자 속이 타 들어가는 남성들이 많다. 몸 둘 바 모르거나 창피한 상황에 몰리더라도 대수롭지 않은 척 해야 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대학졸업 후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김모(27)씨는 지난 연말 장염으로 동네병원에 갔다 수치심을 맛봤다. 간호사는 진료를 마친 그에게 주사를 맞아야 한다며 엉덩이를 까라 했다. 주사실 침대에 누워 바지를 내리고 한참을 기다렸다. 주사기를 갖고 온 간호사는 “주사를 더 아래에 놔야 한다”며 바지를 더 내리라고 했다. 그는 ‘아무리 간호사라지만 그래도 이성이고, 남자도 남에게 보이고 싶은 않은 곳이 엄연히 있는데...’라는 수치심에 눈을 꽉 감았다고 한다.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왁싱숍’에서 속앓이를 한 남성들도 상당하다. 대학원생 임모(31)씨는 지난해 가을 여자친구와 함께 서울 홍대 인근에서 커플 왁싱을 받다 수모를 겪었다. 시술 당일 남자관리사가 없어 여자관리사에게 왁싱을 받았다. 각오는 했지만 가운만 걸치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막상 여자관리사가 들어오니까 얼굴이 달아올랐다. 민망한 자세로 시술을 받으려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이날 경험한 성적 수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평소 맨몸을 드러내는 데 부끄럼이 많았던 직장인 이상훈(28)씨는 지난해 7월 한 대형 수영장에 갔다가 부끄러움만 잔뜩 안은 채 돌아왔다. 뱃살을 가리려 하의 수영복을 입고 상의에 티셔츠를 걸치고 놀던 차에, 미끄럼틀을 타고 기구를 타려는 순간 “상의를 벗어야 한다”는 주문이 날아왔기 때문이다. 옷가지가 마찰을 일으켜 위험할 수 있다는 게 수영장 측 이야기였지만, 여성에게는 당연히 그런 요구가 없었다. 수십 명이 죽 늘어서 자신 쪽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선뜻 옷을 벗기란 쉽지 않았다. 이씨는 “남성 수영복은 당연히 하의만 있는 탓에 맨 몸에 콤플렉스가 있어도 가리기 쉽지 않고, 여성과 달리 남성은 상의를 드러내도 아무렇지 않다는 사회적 공감대는 가끔씩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고 털어놨다.

직장 내에서의 남성들이 성희롱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대기업 입사 4년차인 이모(31)씨는 지난해 9월 부회식 때 집에 일이 있어 먼저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자 한 여자선배가 “개념이 없다”며 역정을 냈다. 이씨가 거듭 양해를 구하자 여자선배는 별안간 화해를 하자며 술을 주더니, 막무가내로 이씨의 볼에 뽀뽀를 했다. 이 사건 이후 이씨는 여자선배들의 ‘먹잇감’이 됐다. 여자선배들이 다반사로 볼을 꼬집고 어깨를 쓰다듬었다. 동기들이 “문제제기를 하라”고 권했지만 이씨는 “과연 남자의 성희롱 하소연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생각에 입을 다물고 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15개 주요 산업 분야 남성 근로자 1,734명 가운데 최근 6개월간 주 1회 이상 성희롱을 당한 적 있다고 답한 비율은 25%에 이른다.

강동우 소장(강동우 성의학연구소)은 “여성이 느끼는 성적 수치심은 혹시 모를 남성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수반되지만 남성의 성적 수치심에는 ‘남자다움’을 유지할 수 없다는 불안과 불편함이 내재돼 있다”고 말했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남성은 유전적으로 성적으로 취약한 모습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남성도 성적 수치심이나 불편함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나미 박사(분석심리학자)는 “남성들은 어려서부터 감정을 표현하기 보다는 행동으로 옮기도록 교육 받은 탓에 자신의 불편함을 말로 표현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며 “하지만 성적 모멸감이나 수치심이 지속되면 술이나 약물 등에 의존해 개인은 물론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우리사회는 더 이상 ‘남성우월사회’가 아니다”며 “남성들도 성적 수치심 등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진정한 양성평등 사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김치중 기자 cjkim@hankookilbo.com

박세인 기자 sane@hankookilbo.com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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