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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8말9초

입력
2016.02.25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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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체제’란 말을 쓰곤 한다. 민주화운동의 결실로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를 중심으로 완성된 헌법 체제가 오늘까지 이어지기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1987년 전후는 국내외에서 굵직한 사건이 잇달아 터졌다. 한국이 유치한 첫 대규모 국제 행사인 아시안게임이 개최된 86년, 형식적 민주주의가 성립된 87년, 동서 진영이 서로 보이콧해 반쪽짜리였던 이전 두 대회와 달리 당시 역대 최대 규모였던 서울올림픽이 열린 88년,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절반을 차지하던 사회주의가 붕괴한 89년. 이 엄청난 파고를 거치고 난 한국은 그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서는 국가 전체를 병영으로 만들던 여러 규제를 풀고 없던 여러 기관과 제도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한강의 기적’을 뽐내고 북한과 벌인 체제경쟁에서 결정적 우위를 점했음을 전세계에 공표할 절호의 기회였다. 외국의 시선에 비칠 선진 한국의 모습을 급히 가꾸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국내의 자원을 동원하기에도 더 없이 좋은 명분이었다.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를 내고 종합운동장을 건립하는 등 한강 주변의 풍광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한강종합개발계획도 아시안게임을 유치한 후 세워졌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은 아시안게임을 직전에 완공되었고, 예술의전당과 한국종합무역센터는 올림픽 전에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급히 조성되었다. 전세계의 손님에게 현대미술관과 오페라극장, 무역센터도 없는 서울을 보여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위신의 문제였다. 국내 자동차 업계를 위협할 만큼 성장한 수입차가 처음 상륙한 때도 1987년이다. 실제로 얼마나 팔리는지는 상관이 없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수도이자 올림픽 개최도시의 거리에 벤츠와 포드도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국내 첫 모터쇼가 열린 해도, 엑셀(이후 아반테)-쏘나타-그랜저로 이어지는 국민차 라인업이 완성된 때도 1988년이다.

올림픽이 열린 해만 해도 한국 사람이 해외로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관광여권이 생긴 건 83년이지만 50세 이상으로 제한했다. 오리지널 ‘꽃보다 할배’라고나 할까. 여권을 발급 받으려면 반공교육을 받아야 했다. 군대를 가지 않은 젊은 남자, 결혼하지 않는 여자가 해외여행을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사회주의 국가로 잠입할 우려가 있는 상황에서 자유로운 해외출입은 결코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1989년 1월 1일에야 해외여행은 자유화된다. 아직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전이었지만 올림픽을 치르고 난 뒤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자신감과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든 국내외의 개방 압력 때문이었다. 외국이 이 정도로 낯설 던 그때 올림픽을 어떻게 개최할 수 있었는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해외를 자유롭게 나다닌 지 불과 4년 뒤 문민정부는 ‘세계화’(globalization이 아닌 segyehwa)를 추진했으니 격변의 연속이란 말도 부족하다.

올해는 이 변화의 물결이 시작된 지 30년이 되는 시점이다. 이를 기념하는 첫 테이프를 국립현대미술관이 끊었다. 과천관 30년 특별전이자 한국현대미술작가 시리즈로 과천관을 설계한 건축가 김태수의 회고전을 지난 18일에 열었다. 또 국립현대미술관은 미술관 30년 아카이브를 중심으로 한 전시도 준비 중이다. 비슷한 시도가 다른 곳에서도 활발히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치제도뿐 아니라 문화, 일상생활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오늘의 기원인 80년대 말 90년대 초는 이제 역사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할 시점이 되었다. 가까운 과거를 비판적으로 조망하고 사라지기 전에 관련자료를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역사가 교훈이라는 말은 무색하고 향수 어린 회고나 70년대로 퇴행하는 것이 시대의 유행인 듯도 하지만, 오늘을 알고자 하는 이가 기댈 곳은 과거뿐이고 오늘을 알지 못하면 내일을 모색할 수 없으니 말이다.

박정현 건축평론가ㆍ도서출판 마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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