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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그른 일로 이익 보려다 손해보는 게 세상” 18년 유배 중 탄원 한 번 안해

입력
2018.03.23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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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제자 곤욕주는 악명 신고식 관행

얼굴에 먹칠하고 동물 흉내 시켜…

다산은 자기 차례에도 꿈쩍 안해

“단 한번만 석방을 빌어보시지요”

강진 유배 15년째 맏아들 편지에

“하찮은 일로 애걸할 수 없다” 답장

57세 중늙은이로 고향 돌아와선

“낡은 집 둘러보니 허망하고 허무”

곤고하던 일생 ‘마갈궁 운명’ 자조

정약용이 영남의 한 벗에게 보낸 편지. 다산은 자신이 마갈궁의 운명이라 일생이 허무했을 뿐이라 토로했다. 편지 상단 왼쪽의 옆으로 쓴 두 줄에 해당 구절이 있다. 수원화성박물관 제공
정약용이 영남의 한 벗에게 보낸 편지. 다산은 자신이 마갈궁의 운명이라 일생이 허무했을 뿐이라 토로했다. 편지 상단 왼쪽의 옆으로 쓴 두 줄에 해당 구절이 있다. 수원화성박물관 제공

“제가 일생이 마갈궁(磨蝎宮)의 운명인지라, 단지 ‘허무(虛無)’라는 두 글자뿐입니다.(此身一生磨蝎, 只是虛無二字.)” 1820년 9월 4일에 다산이 영남 쪽의 어떤 벗에게 보낸 친필 편지에서 한 말이다. 18년의 긴 유배 끝에 40세의 중년은 57세의 중늙은이가 되어 돌아왔다. 그토록 그리던 고향 집은 낡고 퇴락해 더 이상 기억 속의 그 집이 아니었다. 둘러보면 허망하고 허무했다.

“허무할 뿐입니다”

편지에서 자신의 일생을 마갈궁의 운명이라 말한 대목이 목에 컥 걸린다. 고대의 점성가들은 이 운세를 타고 난 사람은 높은 재주에도 평생 좌절과 비방 속에 곤고히 살다 갈 운명으로 보았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한유(韓愈)와 송나라의 소식(蘇軾)이 마갈궁이었다.

소동파는 ‘동파지림(東坡志林)’에서 한유가 쓴 ‘삼성행(三星行)’이란 시를 보고 그가 마갈궁임을 알았는데, 자신도 같은 마갈궁이어서 평생 비방과 기림을 많이 받아, 그에게서 동병상련의 정을 느낀다고 쓴 일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마갈궁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으로는 허균(許筠)과 박지원(朴趾源)이 더 있다. 허균은 ‘해명문(解命文)’에서 마갈궁의 운명을 타고난 자신의 불우를 탄식했다. 연암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정리한 ‘과정록(過庭錄)’에는, 북경에 간 집안사람이 그곳 점쟁이에게 연암의 사주를 보이자, “이 운수는 마갈궁이오. 한유와 소식이 이것과 같았소. 반고(班固)나 사마천 같은 문장이지만, 일 없이 비방을 부를 것이오”라고 했다는 일화가 적혀 있다.

일 없이 비방을 부를 것이오

평생 구설을 달고 다니다 비명에 죽은 조선 최고의 천재 허균, ‘열하일기’ 한편 한편이 나올 때마다 앞 다투어 베끼느라 장안의 종이 값이 올랐다는 조선 최고의 문장가 박지원이 마갈궁의 운명을 타고 났다. 그리고 정조 임금 곁에서 절정의 시기를 꿈꾸다가 급전직하 18년간의 유배로 세상에서 내쳐진 조선 최고의 학자 다산 또한 자신이 마갈궁의 운명이었노라 술회했다. 세 사람 모두 우뚝한 역량에도 불구하고 구설과 비방이 평생을 따라 다녔다.

마갈궁의 운명을 지닌 이들의 행동 특성은 이렇다. 첫째, 압도적 재능과 총기를 타고난 천재들로 특히 문장에 뛰어나다. 둘째, 수틀린 꼴을 두고 못 보아, 이로 인해 말 못할 시련을 겪더라도 무릎 꿇거나 타협하려 들지 않는다. 셋째, 쉽게 갈 수 있는데 굳이 어려운 길을 골라 고통을 자초하고, 옳지 않은 길은 죽어도 안 간다. 넷째, 설령 일확천금의 기회가 생겨도 거들떠보지 않고, 어떤 권력 앞에서도 할 말은 다 한다. 그러니 그 운수가 순탄할 리 없다.

신참례 거부 소동

1789년 3월 13일에 대과 합격 방이 붙었다. 다산은 오랜 수험 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벼슬길에 발을 디뎠다. 며칠 뒤 판서 권엄이 주관한 축하연이 열렸다. 이른바 신참례(新參禮)라는 것으로 급제자에게 갖은 재주를 부리게 하여 곤욕을 안겨주는 악명 높은 신고식이었다.

먼저 급제자의 얼굴에 먹칠을 해서 까마귀를 만들었다. 급제자들이 깜둥이 얼굴로 들어서자 다들 이제부터라는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곧이어 하늘을 쳐다보고 크게 웃기, 절름발이 걸음으로 게 줍는 시늉하기, 부엉이 울음 흉내내기 등의 짓궂은 요구가 쉼 없이 이어졌다. 소리가 적다고, 시늉이 그게 뭐냐고 타박하고, 부엉이 울음에 고양이 소리를 낸다고 다시 시켰다. 난감한 표정 앞으로 깔깔대는 키득거림이 가득했다. 이 통과의례가 끝나야만 합격을 축하하는 질펀한 술자리가 제대로 시작될 터였다.

다산은 제 차례가 와도 꿈쩍도 안 했다. “이 사람, 왜 이러나? 즐거운 자리가 아닌가?” 곁에서 옆구리를 찔러도 다산은 까마귀 얼굴로 정색을 한 채 들은 체도 않았다. 들떠 시끌벅적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다산은 끝내 요구에 따르지 않았다. 좌장 격이던 권엄이 벌떡 일어나 “우리가 고고한 군자를 모셨네 그려!”하고는 나가 버렸다. 먼저 우스개 노릇을 했던 다른 합격자들이 머쓱해졌다. 잔치는 그 길로 파장이 났다.

신참 주제에 가르치려 들다니

한동안 신참의 무례한 행동으로 조정 안에 말이 들끓었다. 얼마 뒤 권엄이 다산에게 편지를 보냈다. 처음 만나 윗사람들과 허물없이 잘 지내자고 해온 오랜 장난의 일을 그토록 정색을 하고 거부하면, 시킨 사람은 대체 뭐가 되느냐는 나무람이었다. 다산이 답장했다.

먼저 망령되고 경솔한 행동으로 선배와 어른께 잘못을 범해 송구하기 짝이 없다는 뜻을 적고, 당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본마음을 간곡히 말씀드릴까 한다고 썼다. 먹물은 남이 바른 것이라 어쩔 수 없이 받았지만, 공경하고 삼가는 마음을 가슴 속에 지닌 지라 난잡하고 우스운 형용만은 차마 흉내 낼 수가 없었다고 썼다. 불공스러운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님을 알아달라고 청을 올렸다. ‘다산시문집’ 권 18에 실린 ‘권판서에게 올리는 글(上權判書書)’에 내용이 자세하다.

수백 년 관습적으로 행해오고, 누구나 그러려니 알고 있던 일이었는데, 다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건방진 놈, 신참 주제에 가르치려 들어!” 다산의 데뷔는 이렇듯 시작부터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정조는 며칠 뒤인 3월 20일에 기다렸다는 듯이 서영보(徐榮輔) 등과 함께 다산을 왕립학술기관인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임명했다. 다산의 규장각 시절이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정조는 문풍 진작을 위해 초계문신을 따로 뽑아 키웠다. 그들 명단을 기록한 초계문신제명록엔 190여명의 이름이 실려 있다. 오른쪽 위 두 번째에 정약용의 이름이 보인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정조는 문풍 진작을 위해 초계문신을 따로 뽑아 키웠다. 그들 명단을 기록한 초계문신제명록엔 190여명의 이름이 실려 있다. 오른쪽 위 두 번째에 정약용의 이름이 보인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내 한 몸 죽고 살고는

강진 유배가 만 8년째로 접어들던 1809년 가을, 맏아들 정학연이 다산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버님, 임금께서 능행하실 때 소자 앞길을 막고 징을 울려 아버님의 억울함을 호소하렵니다. 탄원서의 초고를 보내오니 살펴보아 주소서.” 부친의 억울함이 풀려야 자식들도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나설 수 있을 터였다.

다산은 아들의 편지를 받고, 벗 김이재(金履載)에게 글을 썼다. “아들아이가 내 억울함을 탄원하겠다고 초고를 보내 왔기에 그러지 말고 때를 기다리라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아비가 아들에게 그리하라고 시켰다고 할 게 아닙니까? 제 몸이 살아 돌아가느냐 마느냐는 그저 이 한 몸의 기쁨과 근심일 뿐이지만, 지금은 온 백성이 다 구렁에 빠져 죽게 되었으니 이를 장차 어찌한단 말입니까? 관리의 탐욕은 열배나 더하고, 굶어죽은 시체가 가을인데도 도로에 널렸습니다. 저하나 살고 죽고를 따질 계제가 아니지요.” 그해는 혹독한 흉년이었다.

문집 권 19에 실린 ‘김공후에게 보냄(與金公厚)’은 워낙 긴 편지라 원문 그대로가 아니라 문맥으로 간추려 풀었다.

“아양을 떨고 동정을 애걸하라니”

강진에서의 유배가 10년째로 접어들 무렵인 1810년 9월, 맏아들 정학연은 마침내 능행에 나선 임금의 행차를 막고 격쟁(擊錚)하여 아비의 방면을 청했다. 이에 유배를 풀어 고향집으로 방축하라는 왕명이 내렸다. 하지만, 홍명주(洪命周)와 이기경(李基慶)의 극렬한 반대로 해배는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로도 같은 일이 계속 되풀이되었다.

보다 못한 아들이 1816년 4월,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님, 한번만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셔서 석방을 빌어보시지요.” 다산의 답장은 이랬다. “세상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시비(是非)와 이해(利害)가 그것이다. 옳은 것을 지켜 이롭게 되는 것이 가장 좋고, 옳은 일을 해서 손해를 보는 것이 그 다음이다. 그른 일을 해서 이익을 얻는 것이 세 번째고, 그른 일을 하다가 해를 보는 것은 네 번째다. 첫 번째는 드물고, 두 번째는 싫어서, 세 번째를 하려다 네 번째가 되고 마는 것이 세상의 일이다. 너는 내게 그들에게 항복하고 애걸하라고 하는구나. 이는 세 번째를 구하려다 네 번째가 되라는 말과 같다. 내가 어찌 그런 짓을 하리. 이는 그들이 쳐 놓은 덫에 내 발로 들어가라는 말이 아니냐? 나도 너희들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죽고 사는 문제에 견주면 가고 안 가고는 아무 것도 아니지. 하찮은 일로 아양 떨며 동정을 애걸할 수는 없지 않느냐?”

다산은 아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18년간의 유배를 견디면서 살려달라는 편지 한 장 쓰지 않았다. 부끄러운 것이 없고 잘못한 일이 없는데 제가 먼저 굽히는 것은 마갈궁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결단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 ‘정민의 다산독본’은 조선후기 실학의 대명사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삶을 매주 금요일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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