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정당의 분열이 참담하다. 한국의 보수는 고작 이 수준인가. 탄핵된 정권과 선을 그으며 개혁적 보수를 주창하던 그들이 2일 결국 자유한국당으로 되돌아갔다. 더욱이 권성동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위원장이었고, 장제원 김성태 황영철 의원은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맹활약했던 이들이 아닌가. 유승민 바른정당 대통령 후보의 지지율이 오르지 않자 지푸라기처럼 당과 지조를 버린 그들에겐 결국 다음 총선에서의 당선이 중요했던 것이다.
탈당파의 선택이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라는 것이 또한 비극이다. 그는 트럼프식 막말로 보수층 결집에 성공했다. 홍 후보는 급부상했으나 그 사회적 해악이 만만치 않다. 그의 마초적ㆍ분열적 언사가 ‘우리 사회가 이 정도는 넘어서야 한다’는 최소한의 선을 한참 끌어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설거지는 여성의 몫이고 하늘이 정한 일” “이대 계집애들 싫어한다. 패버리고 싶다” 등 다시 논란이 된 그의 봉건적 성차별 발언은 농담 수준을 한참 지나친다. “강성노조 때문에 기업이 망한다” “전교조를 때려잡겠다”는 주장은 노골적으로 국가 분열을 조장한다. 가짜뉴스와 잘못된 통계 등 사실이 아닌 근거를 들이미는 데에도 용감하다. 최근 페이스북에 올린 “부모상도 3년이면 탈상을 하는데 아직도 세월호 배지 달고 억울한 죽음을 대선에 이용한다”는 글에선 비극을 당한 국민에 대한 배려라곤 없다. 설사 같은 생각을 하는 일부 국민이 있더라도, 대선 후보와 같은 유력인이 대중매체에서 공공연히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속으로만 품고 있던 편견과 혐오를 정당화하고 공식화하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던 독설을 쏟아내 지지층에 카타르시스를 안겨준 것과 마찬가지로 홍 후보도 골수 보수층의 표심을 얻었다. 하지만 이로써 한국의 보수는 합리와 지성의 발판 위에 올라설 절호의 기회를 잃을 판이다.
유승민 후보에게는 퇴행적 홍 후보와 정반대의 정치적 함의가 있다. 그는 한국 정치사 최초로 ‘말이 통하는’ 보수 후보다. 진보 진영이 아닌 보수 진영에서 언제 그만큼 논쟁이 가능한 대선 후보가 있었던가. 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망정 복지를 위해 필요하면 증세를 하겠다는, 솔직하고 일관된 논리를 가졌다. 상대 후보의 공약조차 칭찬할 줄 알았다. 그가 대통령이 되면 상대 정당의 것이라도 좋은 공약은 채택하는 용기가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이번 대선 TV토론회에서 가장 건설적인 대목은 유 후보와 심상정 정의당 후보의 논쟁이었다. 증세, 사드 배치 등을 놓고 두 후보는 격렬하게 부딪혔는데, 양측의 논리가 모두 고민할 여지가 있었던 데다 예의 바르기까지 했다. 이들의 토론은 보수와 진보가 어떻게 이성적인 대화를 통해 의회정치를 할 것인지 미래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초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국민이 유 후보를 선택하지 않는 걸 어쩌냐고 할지 모른다. 바른정당 탈당파의 고민이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러므로 유승민의 승부는 이제부터다. 나는 그가 포기하지 말고 대선을 완주하기를 바란다. 유승민이 새누리당 원내대표 시절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대통령을 작심 비판했을 때보다, 공천파동을 거치며 탈당을 고민하던 때보다 더 중요한 승부가 지금 그 앞에 있다. 한국의 보수가 이대로는 안 된다고 유권자를 설득하고, 바른정당이 매력적인 지성적 보수가 되겠다는 비전을 바른정당 의원과 당원들에게 제시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유 후보를 찍은 표로써, 보수의 개혁을 열망하는 유권자들의 소신을 증명해 보였으면 좋겠다. 지금 인터넷의 많은 댓글에서 외치는 “굳세어라 유승민!”이라는 응원은 이미 그 열망의 표출이다.
한국의 보수가 언제까지나 전근대적 의식과 색깔론에 머물 수는 없다. 이제는 우리 보수도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관용의 정신을 향해, 합리와 지성의 지형으로 한 걸음 전진할 때가 됐다. 한국 보수의 앞날이 유승민의 승부에 달려 있다.
김희원 기획취재부장 h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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