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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 → 日 → 北 경계인의 삶... 끊임없는 현실 탐구 붓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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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 → 日 → 北 경계인의 삶... 끊임없는 현실 탐구 붓질

입력
2016.02.21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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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에 열중하던 사범학교 학생

남로당 활동 중 쫓겨 日로 밀항

화단 밖에서 독학으로 그림 공부

노동자 경험 담은 맨홀 연작 등

日 사회 현실을 대면한 걸작 남겨

‘가면을 벗어라’ 이승만독재도 비판

월북 후엔 숙청 당한 듯 소식 끊겨

'조양규 화집'(미술출판사, 1960) 뒤편 책날개에 실려 있는 사진. 뒤로 일본에 남긴 마지막 대작인 '가면을 벗어라'라 작업이 보인다. 4ㆍ19를 모티프로 마산에서 일어난 항쟁을 다룬 것으로, 김주열로 여겨지는 시신을 둘러싼 시민들과 방독면을 쓰고 총을 든 군인들의 대비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조양규 화집'(미술출판사, 1960) 뒤편 책날개에 실려 있는 사진. 뒤로 일본에 남긴 마지막 대작인 '가면을 벗어라'라 작업이 보인다. 4ㆍ19를 모티프로 마산에서 일어난 항쟁을 다룬 것으로, 김주열로 여겨지는 시신을 둘러싼 시민들과 방독면을 쓰고 총을 든 군인들의 대비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예술가들 가운데는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대가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제도 교육의 코스를 밟지 않더라도, ‘그리기’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고 정규과정의 훈련을 통해서 그려진 작업에 비해 훨씬 풍부한 조형성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가령, 일제 식민지 시기의 경우 유학파나 국내파와 달리 독학파가 예술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수가 많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예술적 성취가 학력을 통해서 달성되지 않는다는 세간의 인지를 잘 더듬어보아도 충분히 독학파가 한 흐름으로 검토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인이 사랑한다는 박수근 역시 보통학교만 마치고 그림을 그렸고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 학업을 포기해야 했던 정현웅은 서양화뿐만 아니라 간판, 출판미술 등으로 영역을 확대한 작가이기도 했다. 심지어 수녀원 보일러공으로 지내던 오우암 작가는 오십이 되어 독학으로 그림을 시작했으니, 예술적 장에서 독학자는 끊이질 않았다. 적어도 예술적 실천 자체는 학력이라는 상징자본에서 비켜설 수도 있는 영역이라는 의미이다.

한국의 미술사가 ‘독학파’의 관점으로 ‘역사화’될 수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학자들이 체계화된 계보나 흐름이 아니라 다른 이력과 맥락을 갖기 때문에 기존의 역사적 인식이나 서술과는 다른 시야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남한정부 수립 후 일본행…이념과 거리두기

조양규가 그러하다. 조양규(1928년 12월 15일~?)는 진주가 본적이고 합천에서 태어났다. 합천 제일초등학교를 마치고 1942년 4월 10일 진주사범학교 심상과에 입학해 해방 후인 1946년 7월 15일 졸업한다. 그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초등교원 양성이 목적인 학교였으나 신통치 않은 성적으로 보아 일본인 교사 밑에서 성실하게 제도화된 공부를 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성실한 공부 자체가 맞지 않는 것이었을 수 있다. 3학년 무렵 학적부에 ‘미술에 열심’이라고 특기사항이 기재되어 있는데, 그가 서서히 미술에 적극적인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열여섯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양규는 데생과 스케치를 꾸준히 했지만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하기 어려웠다. 해방은 이 청년에게 연구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남로당 활동은 그를 도망자로 만들고 만다. 하지만 그가 남로당의 이념적인 노선에 완전히 경도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남긴 수기에 따르면, 그의 남로당 활동은 ‘존경하는 선배’ 혹은 ‘존경할만한 선배’가 있었기 때문에 했던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이념과 사상에 일정한 거리를 갖도록 만든 것이기도 했다. 피신해 있던 남해의 어느 섬으로까지 기관원이 잡으러 오는 바람에 동창생들이 교사로 있었던 부산 토성국민학교 양호실에 기거하게 되지만,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그는 더 이상 남한에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조양규는 1948년 여름 무렵, 마산이나 부산 혹은 남해안 어딘가에서 밀항선에 오른다.

북한에 간 직후 '조선미술' 1961년 1월호에 실린 조양규의 사진과 '속사'(스케치의 북한식 표현으로 여겨진다)로 그려진 서평양 건설 현장. 북으로 간 조양규는 환영받았으나 일본에서 보여줬던 긴장은 더 이상 캔버스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김일성 1인체제에서 ‘속사’ 이외에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이 차단당하면서 일어난 일일 것으로 짐작될 따름이다.
북한에 간 직후 '조선미술' 1961년 1월호에 실린 조양규의 사진과 '속사'(스케치의 북한식 표현으로 여겨진다)로 그려진 서평양 건설 현장. 북으로 간 조양규는 환영받았으나 일본에서 보여줬던 긴장은 더 이상 캔버스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김일성 1인체제에서 ‘속사’ 이외에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이 차단당하면서 일어난 일일 것으로 짐작될 따름이다.

풍요 이면의 현실 드러내 되레 주목

구사일생으로 도쿄의 에다카와(枝川)에 도착해 가까스로 정착하게 되었지만, 조양규는 당시 가장 강력한 정치세력인 일본 공산당과 연합 전선을 구축했던 재일조선인 공산당 세력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당 가입을 거부한다. 그가 남긴 증언에 따르면, 그때의 일본에는 존경할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그마화된 가치나 어떤 경직된 분위기 그리고 다분히 강제적인 방식의 당 가입 권유가 그로 하여금 공산당 가입을 할 수 없도록 만든 원인이었다. 당시 공산당 가입 확인만 되면 취업이 매우 용이했다. 항구의 부두 창고에서 하역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그는 이를 물리치기가 어려웠을 것인데도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조양규는 남한에서 하지 못한 그림 공부를 이어가고자 무사시노(武藏野)대학에 입학한다. 이 시기 학적부가 남아 있지 않아, 확인이 되지 않지만 아마도 야간에 개설된 학부에서 공부를 했거나 주말에 특별히 개설되는 과정에 등록해 그림을 배우고자 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도 여의치 않아 2년 만에 중단하게 된다.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처지 때문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아카데미 안에서 그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1950년대 일본 화단은 다분히 현실과 생활을 ‘추상적’으로 그리는 경향이 지배한데 비해, 조양규는 ‘생활’과 ‘현실’을 그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수기에서 그는 이를 ‘랑그(문법, 도그마)가 아니라 빠롤(생활, 삶)’을 그려야 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작업은 일본에서 ‘조선전쟁’ 소식을 듣고 그린 ‘조선에 평화를!’에서부터 창고 노동자로 생활한 경험을 담은 창고 연작, 맨홀 연작들로 나타났다. 조양규의 작업은 당대 일본 화단의 분위기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일본 화단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이 시기 ‘조선전쟁’을 통해서 경제 부흥의 발판을 마련한 일본 사회는 한편으로는 풍요를 구가할 수 있었지만, 일본의 하층민들은 그 이면에 가리워져 있었다. 게다가 재일조선인들은 일본공산당에게서도 망각되거나 은폐되는 존재였다.

당시 일본 화단의 주류이던 리얼리즘이 현실보다 구조에 더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현실을 지워버리는 방식의 화풍이었다면, 조양규는 구체적 삶을 통해 추상적 구조를 드러내는 데에 주력했다고 할 수 있다.

조양규 작 '31번 창고'. 캔버스에 유채. 65.2×53(광주시립미술관 소장, 1955년). '창고' 연작과 '맨홀' 연작은 일본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탐색이자 아시아의 냉전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내재된 작업이다. 창고란 상품이 적재되는 공간이자, 일본이 한국전쟁을 통해 부흥을 이룬 계기로 포착된 것이었으며 맨홀은 그 과정에서 휩쓸려 버린 존재들이 힘겹게 생존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양규 작 '31번 창고'. 캔버스에 유채. 65.2×53(광주시립미술관 소장, 1955년). '창고' 연작과 '맨홀' 연작은 일본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탐색이자 아시아의 냉전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내재된 작업이다. 창고란 상품이 적재되는 공간이자, 일본이 한국전쟁을 통해 부흥을 이룬 계기로 포착된 것이었으며 맨홀은 그 과정에서 휩쓸려 버린 존재들이 힘겹게 생존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념과 아카데미, 국가와 국가 사이 경계인

그러나 1960년 10월, 몇몇 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북송선을 타기로 결심한다. 북한에 도착한 이후 그는 중요한 작가로 받아들여졌고 북한의 공식적인 미술잡지였던 ‘조선미술’에 창작 원리와 관련한 글을 1967년 2월까지 싣는다. 북한에 도착한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로 1년 유학을 떠나 돌아왔다고 하지만 이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주체사상이 등장하고 김일성 유일체제가 되면서, 1967년 이후 조양규의 이름은 공식적인 공간에서 사라진다. 여러 가지 설에도 불구하고 남로당 활동 경력이나 일본 내에서 공산당 가입을 회피한 것, 공식 창작 원리에 반하는 창작 형식을 고수한 것 등으로 숙청을 피하지 못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 도쿄 조선인 부락에서 '맨홀C'(1959)로 보이는 작품을 들고 걸어가는 조양규. '미술수첩' 1960년 11월호에 실린 조양규의 사진에서는 한국-일본-북한의 엄혹한 경계를 뚫고 나아가는 낯선 지도 작성자의 힘겨움이 감지된다.
일본 도쿄 조선인 부락에서 '맨홀C'(1959)로 보이는 작품을 들고 걸어가는 조양규. '미술수첩' 1960년 11월호에 실린 조양규의 사진에서는 한국-일본-북한의 엄혹한 경계를 뚫고 나아가는 낯선 지도 작성자의 힘겨움이 감지된다.

일본 근현대미술사에서 조양규의 위상은 ‘재팬 머니’를 통해 문화적 자긍심을 수출하고자 했던 일본이 파리에서 개최했던 일본 근현대미술 전시에 프랑스인 큐레이터가 그를 포함시킨 것이나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 발간한 전시도록에 다른 작가와 달리 무려 두 페이지에 걸쳐 그가 소개된 것만 보더라도 파악할 수 있다. 조양규의 이런 성취는 그가 이념적 창작원리와 아카데미의 제작 방식에서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었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맨홀 연작은 당대 일본 화단의 그 누구보다도 정직하게 일본 사회의 현실을 대면해 길어 올린 걸작이다. 1960년 4ㆍ19 소식을 듣고는 ‘가면을 벗어라!’를 통해 이승만 독재에 대한 비판과 시민들의 비참을 강렬하게 드러내 그의 관심이 한국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조양규가 현실과 부단히 부대껴 형상화하려 했던 현실 탐구는 북한에서는 ‘적절하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더라도 전체적으로 조양규의 작업은 이념과 아카데미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바쳐진 탐구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념과 아카데미, 국가가 그리지 못했던 삶과 현실을 파악하려는 절절한 노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한국과 일본 그리고 북한에 걸쳐 있는 조양규의 예술이 오랫동안 남북한 미술사에 공백으로 남아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김만석 미술평론가ㆍ공간 힘 큐레이터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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