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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조영남 그림대작, 통용되는 방식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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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조영남 그림대작, 통용되는 방식 아니다”

입력
2017.10.18 20:0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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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투라는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재료ㆍ도구ㆍ장소 등 모두 일임

200점 이상 그림 받아 덧칠만

앤디 워홀 등 현대미술 작가들

구상부터 완성까지 지휘감독

'그림 대작(代作)' 사건으로 기소된 가수 조영남씨가 18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류효진 기자
'그림 대작(代作)' 사건으로 기소된 가수 조영남씨가 18일 오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류효진 기자

“피고인의 행위에 대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비난을 넘어 형사처벌 대상으로까지 볼 수 있는지 미술계와 법학계에서 찬반 양론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국내외를 살펴봐도 유사 사례나 판례를 찾기 힘든 상황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8단독 이강호 판사는 18일 가수 조영남씨의 사기 혐의 선고 공판을 열고 판결에 앞서 이례적으로 재판 소회를 밝혔다. 조씨는 2011년부터 지난해 4월까지 화가 두 명에게 화투 관련 그림을 그리도록 주문한 뒤 자신은 마무리 작업만 해 서명을 새기고 이를 비싼 값에 팔아 재판에 넘겨졌다.

1973년 첫 개인전 이후 40회 남짓 전시회를 열며 스스로 ‘화수(화가 겸 가수)’라 표현해 온 조씨는 오래 전부터 화투 그림에 천착해 왔다. 정식으로 미술을 배운 적 없는 조씨는 화투 등을 직접 잘라 붙이는 콜라주기법을 활용해 작품 활동을 해왔고, 독창성 있다는 호평과 산만 조악하다는 혹평을 함께 받아 왔다.

‘그림 대작(代作)’ 사건은 2009년 조씨가 알고 지내던 뉴욕 출신 무명 직업화가 송씨에게 자신의 콜라주 작품을 회화로 다시 그려보라고 제안한 게 발단이다. 완성품이 마음에 든 조씨는 그때부터 작품을 직접 만드는 대신 송씨로부터 200점 이상 화투 그림을 받아 덧칠 등만 한 뒤 자신 이름을 걸고 전시했다. 예술계는 “조악함에서 벗어나 표현이 다양해지고 섬세하며 입체적”이라고 호평했다.

“화투 그림은 쉬워 보여도 굉장히 고뇌하며 밤새워 그린 작품이다”(2014년) “배운 경험이 없어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고, 화투가 많이 들어간 큰 그림은 몇 달 동안 그렸다”(2016년) 등 고충을 털어놓은 인터뷰도 잇따라 하면서 조씨는 현대미술 화가로 서서히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사이가 틀어진 송씨가 검찰에 이를 제보하면서 조씨 명성은 급전직하했다. 조씨 이름으로 점당 최대 1,200만원에 팔린 그림은 사실 조씨가 10만원을 주고 송씨에게 그리게 한 그림이었다. 다른 대작 화가도 썼다. 춘천지검 속초지청은 지난해 6월 조씨에 대해 그림 26점을 1억8,000만원에 판 사기 혐의로 기소했다.

미술계는 “대작은 미술계 관행”이라고 기소에 맞선 조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미술인들 명예를 더럽히고 사기꾼 누명을 씌웠다”는 것이다. 반면 미술평론가 진중권씨는 법정 증인으로 나와 “현대 개념미술은 아이디어가 핵심, 화투 그림은 800% 조씨 작품”이라고 조씨를 옹호했다. 대작의 정체성 논쟁이 첨예하게 불붙는 형국으로 흘러갔다.

고심 끝에 이 판사는 조씨를 유죄로 판단했다. 화투라는 아이디어만 주고 송씨에게 재료와 도구 작업장소와 시기 등을 모두 일임한 조씨 방식은 현대미술에서 용인되는 대작 방식으로 볼 수 없다고 짚었다. 이 판사는 “앤디 워홀 등 보조인력을 고용해 대량생산하는 현대미술 작가는 이들을 정식 고용해 정당한 보수를 지급하고, 작품 구상부터 완성까지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지휘 감독을 한다”고 부연 설명했다. 조씨가 인터뷰를 통해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연출하고, 조씨가 직접 그린 그림이 아니란 걸 알았다면 사지 않았을 것이라고 구매자들이 진술한 점도 판결에 감안했다. 미술계 일대 파장을 불러온 조씨는 이날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이 판사의 재판 소회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이 판결을 계기로 예술계 창작 활동과 거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활발한 토론이 벌어져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합리적 기준이 제시되기 바란다.”

조씨는 유죄판결 후 “재판에서 작품 작업과정을 있는 그대로 설명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김민정 기자 fac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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