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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피스

입력
2017.05.03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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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5.4

캐나다 반핵단체 'Don't Make a Wave Committee'가 1972년 5월 4일 그린피스재단으로 거듭났다. 사진은 동아시아지부 석탄화력 반대 캠페인 포스터. greenpeace.org/eastasia/
캐나다 반핵단체 'Don't Make a Wave Committee'가 1972년 5월 4일 그린피스재단으로 거듭났다. 사진은 동아시아지부 석탄화력 반대 캠페인 포스터. greenpeace.org/eastasia/

1960년대 말 미국의 핵실험 장소 중 한 곳이 알래스카 알류션(Aleutians) 열도 끝 화산서 암치트카(Amchitka)였다. 암치트카는 수많은 야생조수의 서식처이기도 했지만 그 곳 지하 핵실험은 캐나다 서부해안지역 주민들로서도 공포스러운 거였다. 64년 알래스카 지진과 잇따른 쓰나미로 밴쿠버 주민들이 예민해져 있던 때였다. 69년부터 주민 반대 시위가 이어졌고, 그 열기가 온타리오와 퀘벡으로 번져갔다. 미국은 실험을 강행했고, 그 강도를 점점 높여갔다.

69년 10월, 환경단체 ‘시에라클럽’ 멤버로 2차대전 참전 미 해군 출신 산림학자 짐 볼른(Jim Bohlen)과 퀘이커 교도인 어빙- 도로시 스토 부부, 로스쿨 학생이던 폴 코트 등이 지속적인 반핵활동을 위한 단체 ‘Don’t Make a Wave Committee’를 결성했다. ‘풍파저지위원회’쯤으로 번역될 그 위원회가 70년대 이후 지구 환경운동의 전위로 자리잡은 ‘그린피스(Green Peace)’의 전신이었다.

위원회의 전술은 핵실험 현장에 최대한 다가가 다만 ‘묵묵히 지켜보는 것(Bearing Witness)’이었다. 71년 필리스 코맥(Phyllis Cormack)호를 타고 첫 출항한 이래 회원들은 폭풍우에 밀리고 삼엄한 경비에 쫓겨나는 싸움을 반복했다. 전세계 매스컴이 그들을 주목하면서 동참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그린피스’라 이름 붙인 그들의 싸움은 모두의 싸움이 됐고, 그 전술적 패배들이 이어져 그 해 말 핵실험을 중단시켰다. ‘비폭력 직접행동을 통한 긍정적 변화’는 그 때부터 이어져온 그린피스의 활동원칙이다.

위원회는 72년 5월 4일 ‘그린피스 재단’으로 변신, 환경 이슈 전반에 대응하는 국제환경단체가 됐다. 포경금지 등 해양보호 캠페인을 비롯해 산림보호, 지속가능 농업, 기후에너지, 독성물질 반대 등이 근년의 주요 이슈. 최근에는 에너지ㆍ자원ㆍ독성물질 등 주요 환경 이슈들이 집약된 IT산업을 타깃 삼아 전자폐기물 감축 캠페인 등을 벌이고 있다.

그린피스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제본부를 중심으로 세계 55개국 26개 지역사무소가 있고, 서울사무소는 동아시아지부 소속으로 2011년 설립됐다. 전적으로 시민 후원금으로만 운영돼 국경과 체제 제약 없이 활동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관료화와 비효율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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