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임 중 이승만의 대표적인 과오 중 하나는 개헌을 통한 무리한 장기집권이었다. 4ㆍ19혁명의 도화선이었던 3ㆍ15의거는 4선 집권 체제를 안정적으로 구축하려고 부통령을 자유당의 이기붕으로 하려다 벌어진 부정선거 때문에 끓어 올랐다.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고교생 김주열을 비롯해 200명 가까운 시민이 희생됐다.
이승만은 결국 4ㆍ19 일주일 뒤 하야를 택한다. 하야 선언에서 실행하겠다고 밝힌 내용의 첫 줄이 이렇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그는 그러고 한 달만에 하와이 망명길에 올랐다. 애초 잠시 피했다 돌아올 생각이었지만 꿈은 이루지 못했다. 낯선 땅도 아니었지만 심한 향수병을 앓았다. 망명 2년 뒤 한국행 비행기 티켓까지 끊었지만 누구도 반기지 않았고 귀국길은 막혔다. 거주지를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지내다 실어증에 걸렸고 결국 요양원에서 심장병으로 숨지고 만다.
소설가 최인호는 이승만의 죽음을 ‘독재자다운 비참한 말로’라고 썼다. 하지만 정작 더 처참한 대통령의 말로는 그 뒤 박정희 정권에서 벌어졌다. 10ㆍ26은 갑작스럽긴 했지만 느닷없는 일은 아니었다. 박정희 역시 부정선거를 통한 장기집권, 민주주의 탄압 등 꼽자면 헤아리기 힘든 폭정을 저질렀다. 1979년 10월 부마항쟁 역시 유신독재 반대와 야당 지도자 탄압 중단을 요구하며 일어난 것이었다.
민주주의를 앞당기려면 박정희가 죽는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시민들이 박정희 정권의 종식을 고대하며 행동에까지 나섰던 것은 불문가지다. 죽음이 아니더라도 박정희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죄과를 치러야 했던 대통령이었다.
지금 매주 광화문 광장을 중심으로 모이는 100만 시위대와 유사하면서 시간적으로 가까운 경험은 1987년 6월 항쟁이다. 전두환 군사정권도 민주주의와 인권을 탄압했고 야당과 재야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봉쇄했다. 6월 10일 전국 18개 도시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주도하는 개헌 쟁취 시위가 벌어졌다. 보름 뒤 시위 규모는 더 불어나 전국에서 100만이 운집했다. 전두환은 결국 시민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무사히 임기를 마쳤다. 하지만 그의 죄과는 그 정도로 끝나고 말 것이 아니었다.
퇴임 뒤 전두환은 여론에 밀려 백담사로 숨어들어야 했고 국회 청문회장에도 섰다. 결국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과 비자금 등으로 구속돼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고 2년 간 옥살이를 했다.
검찰이 최순실 게이트의 사실상 주범으로 보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은 시민을 죽인 적도 없고, 막대한 비자금을 숨기지도 않았으니 앞선 이런 대통령들과 비교할 수 없다고 할 사람도 있겠다. 보도대로라면 “내가 뭘 잘못했는데요”라는 대통령 자신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임명한 검찰총장이 이끄는 조사의 결과 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범죄 피의자 신분이 됐다. 직권남용이든, 뇌물죄든, 대통령기록물법 위반이든 뒤에 확정될 죄목이 무엇이든 지금 벌어진 현실만으로도 국가 지도자의 자격을 상실한 상태라고 볼 수밖에 없다. 헌법학자들이 입을 모아 “드러난 것만으로도 탄핵 사유로 넘친다”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시민들은 이 같은 형법상 죄목이나 그 시시비비보다 그의 국정수행 행태가 안겨준 어이없음을 더 큰 죄과로 여길는지도 모른다. 사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국정의 중요 자료를 유출시키고, 비영리라지만 사사로운 이익을 위한 것이 농후한 지인의 재단 사업을 위해 대통령 권한을 이용하는 등 무분별하기 짝이 없는 공사(公私) 혼동에 민주주의 체제의 세례를 받은 시민은 다들 어안이 벙벙해져 있다.
“지도자로서 가장 큰 악덕은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는 마키아벨리의 기준에 따른다면 경멸과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박근혜 대통령은 큰 악덕을 범한 지도자가 된다. 그도 어떤 형태로든 이 죄과를 치르게 될 것이다. 어떻게 치를까. 바로 지금 그가 하기에 달렸다.
김범수 문화부장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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