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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74)과거를 묻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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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74)과거를 묻지 마세요

입력
2002.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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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할 두 가지 에피소드는 지금까지 한번도 밝힌 적이 없는 것들이다. 내가 본의 아니게 제비족과 해결사로 활약한 이야기이다.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당장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가슴 아픈 사연이다.

1971년 가을 친구 방일수(方一秀)의 꼬임에 빠져 베트남으로 떠날 당시 나는 한 술집 여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60년대 액션스타로 이름을 날린 고 황 해(黃 海) 선배가 사귄 여성 중에 ‘아나짱’이라는 누이가 자기가 데리고 있던 아가씨 한 명을 소개했던 것이다.

아나짱은 서울 서대문에서 고급 요정을 경영하던 재력가로 그의 눈에는 무명MC인 내가 무척 불쌍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돈 많이 버는 애니까 잘 사귀어 봐”라는 아나짱의 말 그대로 그녀는 정말 잘 살았다.

20대 중반 나이에 요즘으로 치면 고급 빌라에 속하는 동대문 아파트에 살고 있을 정도였다. 이에 비해 나는 아직도 집 한 칸 없는 무명MC에 불과했다.

더욱이 71년 그 해에는 아내마저 춘천으로 내려가 있는 바람에 아이들 3명과 함께 서울의 한 여인숙에서 하숙 생활을 하고 있던 처지였다.

베트남으로 위문공연을 떠나기 며칠 전 나는 고민에 빠졌다. 아이들 때문이었다. 나는 용기를 내 동대문 아파트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아이들을 1, 2년만 맡아달라. 대신 베트남 갔다 올 때 TV와 냉장고를 많이 가져오겠다.” 아파트를 나서는 내 마음은 물 먹은 솜 마냥 무겁기만 했다.

‘사내 놈이 오죽 못났으면 자기 자식들을 남의 집에 맡기나’ 하는 자책감이 나를 짓눌렀다. 나는 돈 많은 여성을 이용한 제비족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3개월 후 서울에 올라온 아내에 의해 들통이 나고 말았다. 바람을 피운 사실도 발각됐다.

어머니까지 “이 같은 못난 놈과는 당장 헤어져야 한다”고 노발대발하셨다. 베트남에서 이 사실을 들은 나는 이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여보. 그 여자를 사랑해서 같이 산 것은 아니야. 살기 위해선 돈 많은 누군가가 필요했어. 최소한 아이들 밥 세 끼를 먹이려면 어쩔 수 없었어. 미안해’.

지방공연에서 해결사 노릇을 한 것도 지금까지 내 마음을 짓누르는 잊지 못할 사연이다. 베트남 공연 후 지방 공연의 보조MC로 나섰을 무렵 나는 오히려 해결사로 이름을 날렸다.

첫 공연 때부터 맨 앞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쇼를 훼방 놓는 지역 깡패들을 제압하는 일을 내가 맡았다. 문제는 이 일을 하면서 주연 배우들로부터도 돈을 뜯어낸 것이다.

당시 깡패들의 쇼 훼방은 악명 높았다. 1회 공연 내용을 중요 대목마다 빼놓지 않고 눈 여겨 봐뒀다가 2회 공연 때부터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한발 앞서 대사를 읊어 김을 빼버리는 것이었다.

가수가 나올 때마다 비아냥거리거나 발을 구르는 것은 기본이었다.

내가 미리 단속을 해놓지 않으면 동네 깡패들이 객석의 반을 점거하기 일쑤였다. 특히 분장실마저 점거한 날이면 배우들은 서서 분장을 하거나 문밖에서 옷을 갈아 입어야 했다.

나는 이 점을 이용해 쏠쏠히 돈을 챙겼다. 가수나 초청 배우들에게 접근해 “요즘 애들이 워낙 시끄러워서 말이에요…”라고 운을 떼면 대개 알아서 돈을 집어줬다.

나는 이 돈 중 일부는 깡패들 식사와 소주 값으로 쓰고 나머지는 고스란히 챙겼다가 담뱃값 술값으로 썼다.

덕분에 내 출연료는 한푼도 손 대지 않은 상태로 아내에게 전달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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