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정모
서울특별시립과학관장

등록 : 2016.04.19 14:17
수정 : 2016.04.19 19:48

[이정모 칼럼]만국의 탈모인이여, 모든 소수자와 연대를!

등록 : 2016.04.19 14:17
수정 : 2016.04.19 19:48

잠자리에 들기 싫은 애를 재울 때마다 어릴 때 할머니에게 들은 얘기를 해주곤 했다. 그렇다고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는 호랑이 얘기를 해줬다는 게 아니다.

할머니는 나를 재울 때 “키는 잠잘 때만 크는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키 크는 데 별로 관심이 없었던지 나는 가능하면 늦게 잤고 그래서인지 실제로 키가 작다. 나는 내 딸에게 여기에 덧붙여 “너도 키가 크고 싶으면 잠을 자야 해, 아빠가 키가 작은 이유는 어릴 때 잠을 자지 않아서야”라며 반협박을 했다. 알고 보니 이게 터무니없는 협박이 아니었다. 실제로 성장호르몬은 밤 10시에서 새벽 2시 사이에 가장 많이 분비된다. 따라서 성장기의 아이들은 밤 10시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키는 어느 정도 자라면 멈추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줄기차게 자라는 게 있다. 손톱과 발톱 그리고 머리카락이다. 손톱은 하루에 0.1㎜ 정도 자라고 발톱의 성장 속도는 손톱보다 3배 더디다. 손톱이 완전히 새로 바뀌는 데는 4개월 정도 걸리고 발톱이 모두 자라는 데는 1년이 걸리는 셈이다. 손톱과 발톱을 모두 합치면 1년에 거의 50㎝가 자란다. 어차피 깎아버릴 건데 이렇게 마구 자라는 게 좀 아깝기는 하다.

머리카락은 손톱보다 세 배쯤 빨리 자란다. 머리카락은 정말 생장 능력이 대단한 녀석이다. 모구에 있는 케라티노사이트에서 머리털이 하루에 0.3~0.5㎜씩 자란다. 케라티노사이트가 우리 머리에 10만 개쯤 있으니까, 1년에 자란 머리카락을 모두 이으면 16㎞나 된다. 세포 분열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것이다.

항암치료를 하면 머리가 빠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항암치료란 암세포의 증식을 막는 방식인데, 암세포만 선택해서 증식을 막을 수는 없다. 다른 세포의 증식도 막는다. 평상시에는 머리카락이 빠지는 만큼 머리카락이 새로 나기 때문에 일정하게 유지되는데 항암치료로 이게 안 되니까 머리가 먼저 빠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천문학자인 내 친구 이명현 박사는 아가씨처럼 머리를 길게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다닌다. 이제 나이도 있고 예전처럼 날씬하지도 않아서 긴 머리가 별로 섹시해 보이지 않으니 좀 자르라고 핀잔을 해도 꿋꿋하게 기른다. 알고 보니 소아 암환자들에게 선물할 가발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기르는 것이라고 한다. 착한 마음씨가 갸륵하다.

세상 도처에 착한 사람들이 많다. 작년 5월의 일이다. 미국 메이저리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선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머리를 빡빡 밀었다. 3루수 마이크 아빌레스가 갑자기 부진해졌다. 네 살배기 딸이 백혈병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팀은 아빌레스에게 딸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휴가를 주었고, 아빌레스는 딸을 위해 삭발을 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머리가 빠진 딸이 자신의 민머리에 낯설어했기 때문이다. 아빌레스가 팀으로 복귀했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모든 팀원과 구단 직원들이 머리를 빡빡 밀었기 때문이다. 동료의 아픔에 연대를 표시한 것이다. 아름다운 이야기다.

머리를 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2년 전 세월호에 탔던 아이들의 부모들이 작년에 단체로 삭발한 적이 있다. 부모도 울고 깎는 사람도 울고 지켜보는 사람들도 울어야 했다. 머리가 없으면 눈에 띈다. 주목을 받아야 하는 불편한 일이다. 그것을 감수하고 머리를 깎았으면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하고 꼬인 것을 풀어주고 막힌 곳을 뚫어주는 게 상식이고 정부의 일이다.

항암치료를 받는 것도 아니고 시위성 호소를 위한 것도 아닌데 머리가 빠져서 괴로운 사람들도 있다. 우리 아버지는 머리가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심한 대머리였다. 결혼 사진에서 이미 훤칠한 이마를 과시하고 있던 것으로 보아 20대에 탈모가 시작된 것 같다. 그래도 30세에 결혼을 하셨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내가 태어나지 못할 뻔했다. 아버지의 피를 열정적으로 물려받은 내 동생도 꽤 대머리다. 이런저런 치료제를 발라봤고 급기야 중국에 가서 머리 이식 수술까지 받고 왔다. 말은 안 하지만 탈모로 인한 스트레스가 꽤 컸을 것이다.

우리는 머리카락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머리카락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기관인 두뇌를 감싸고 다양한 충격에서 두뇌를 보호한다고 한다. 머리카락이 뇌 보호에 별로 주요하지 않은 것은 최고의 천재 가운데 스티브 잡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스티브 발머처럼 대머리들이 꽤 있는 것으로 보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모인들은 이런저런 차별을 많이 받는다. 오죽하면 탈모 치료를 받은 사람만 20만명이 넘고 잠재 인구까지 하면 1,000만이 될 거라는 추산이 나오겠는가. 탈모 환자가 많아지고 취업준비생들까지 두피에 신경 쓰다 보니 탈모시장은 최근 5년간 10배 넘게 성장해서 그 규모가 1조4,000억원에 이른다.

최근에는 탈모 환자들에게 머리 문신이 인기다. 두피 문신은 의료용 특수잉크로 두피에 미세하게 점점이 문신을 하여 머리카락처럼 보이게 하는 착시효과를 일으킨다. 정수리에 머리가 조금 빠진 사람에게는 마치 흑채를 뿌린 효과가 있다. 서양에서는 탈모인들이 아예 머리를 빡빡 밀고서 머리카락이 없는 곳에만 머리 문신을 한다. 결과적으로는 똑같지만 사람들은 다르게 받아들인다. 여성들은 원래부터 머리가 없는 대머리 남성에게는 부정적인 인상을 갖지만 머리를 일부러 밀어서 삭발한 남성에게는 성적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대머리는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사회 생활에서 불편함을 느낄 이유가 없다. 왼손잡이, 성소수자, 장애인, 외국인, 혼혈인들도 마찬가지다. 탈모인들이 당당히 살 수 있는 사회란 여타의 다른 소수자들도 당당히 살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소수자들에 대한 배려와 인정이 모두가 당당한 사회를 만들 것이다. 만국의 탈모인들이여, 모든 소수자들과 연대하라!

서울시립과학관장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국일보 페이스북

한국일보 트위터

한국일보닷컴 전체기사 RSS

RSS

한국일보닷컴 모바일 앱 다운받기

앱스토어구글스토어

한국일보닷컴 서비스 전체보기

Go

뉴스 NOW

이전

  • 종합
  • 정치
  • 사회
  • 경제
  • 국제
  • 문화
  • 연예
  • 라이프
  • 스포츠

다음

오늘의 사진

많이 본 뉴스

  • 1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