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밀도 도시 서울에서 익혀야 할 자세 중 하나는 외면이다. 시선, 소음, 악취, 범죄로부터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벽을 치고 담장을 두르고 창에 까만 필름을 붙인다. 그 결과 남은 것은 텅 빈 골목이다. 건물의 출입구와 주차장, 벽으로만 이뤄진 거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계속 앞으로 걷는 것뿐이다. 지난해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지어진 8층짜리 스튜디오 주택 알룸은 건물이 길에 화답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한다. 홍진희(건축사사무소 스무숲) 건축가는 “건물을 여는 것이 죽은 골목을 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주머니 공간, 다락, 테라스… 일터와 쉼터가 하나로
선릉 맞은편 주택가 골목에 자리한 알룸은 사무실과 주거가 합쳐진 건물이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부부는 노후대비용으로 오래된 다가구 건물을 매입, 임대와 주거를 겸하는 건물을 새로 지었다. “원룸이나 다가구는 포화상태인 것 같아 사무실이 같이 있는 건물을 생각했어요. 맨 위층에 우리 부부가 살거라, 관리 면에선 사무실이 더 편할 거란 판단도 있었고요.”
건축주의 의뢰에 홍진희 소장은 반색했다. 일과 주거가 합쳐진 스튜디오형 주택을 수년 전부터 구상해왔기 때문이다. “최근 1인기업이나 2,3명이 함께 하는 벤처기업, 창작집단이 늘면서 직장과 집의 경계가 점차 흐려지는 추세예요.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계속 생각했습니다. 사무실이지만 일만 하는 게 아니라 낮잠도 자고 샤워도 하고 커피도 한 잔 할 수 있는, 일과 휴식이 7대3 정도의 비율로 섞여 있는 공간이요.”
알룸은 용도상 지하 1층부터 5층까지 근린생활시설(사무실), 6층부터 8층까지 다가구로 분류된다. 그러나 사무실에 딸린 잉여공간을 통해 집의 기능을 일부 겸한다. 겉으로 볼 땐 평범한 사무실이지만, 벽에 달린 미닫이 문을 밀면 두세 계단 아래 감춰진 공간이 나타나는 식이다. 홍 소장은 이를 방이 아닌 “주머니 공간”이라고 불렀다.
“여닫이 문에 문고리가 달린 방이었다면 주 공간과 하나로 인식됐을 거예요. 그럼 분리의 의미가 약해지죠. 벽과 같은 색깔의 미닫이 문으로 분리된 주머니 공간은, 문만 닫으면 없는 것처럼 사용할 수 있어요.”
입주하는 업체에 따라 주머니 공간의 쓰임새도 달라진다. 302호에 입주한 필라테스 교습소의 원장은 침대를 하나 넣어 손님이 없는 시간에 쪽잠을 자거나 막차를 놓쳤을 때 자고 가는 용도로 쓴다. 규모가 작아 주머니 공간이 없는 301호에는 다락을, 502호엔 602호와 공유하는 복층 테라스 공간을 만들었다. 평수로만 가치가 매겨지는 임대건물의 밋밋한 평면에 아쉬움을 느낀 건축가는 일부러 모든 실을 다르게 디자인했다.
그 중 가장 재미있는 집은 주인 부부가 사는 8층이다. 아내는 교사, 남편은 회사원으로 일하다가 정년퇴직한 부부는 제2의 인생을 전혀 다른 자세로 맞았다. 이제는 쉬고 싶어하는 남편과 달리 아내는 끝까지 일하고 싶어했고 결국 자매들과 함께 빵집을 차렸다. 부부의 갈라진 라이프스타일은 집 구조에 그대로 반영돼 독립된 두 개의 침실이 만들어졌다. 붙박이장으로 분리된 두 개의 방은 필요하면 간단히 합칠 수 있다. 아내는 “우리 나이 되면 원래 방 따로 쓰는 것”이라고 쿨하게 말했다. “조금만 뒤척여도 신경 쓰이고 TV도 각자 다른 거 보는데 굳이 한 방 쓸 이유가 없죠. 놀러 오는 친구들이 다 부러워해요.”
넓은 다락은 어린 손주들을 위한 공간이다. 평생 아파트 층간소음에 시달린 부부는 손주들이 오는 즉시 다락으로 올려 보낸다. 장난감과 놀이기구, 테라스가 갖춰진 다락에서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 논다.
열린 건축, 동네의 풍경을 꿈꾸다
건축가가 스튜디오 주택을 꿈꾼 것은 1인기업 수요 때문만은 아니다. 가리고 닫기에 급급한 건물들에 문제의식을 느낀 홍 소장은 적극적으로 열린 건축을 통해 건물이 동네의 한 ‘풍경’이 되길 바랐다. “상업지역은 그나마 상가가 있어서 길을 향해 열려있지만, 주거지역의 폐쇄는 심각한 수준이에요. 주거용 건물이 어떻게 하면 거리와 소통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저층에 가게가 있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가게는 도로의 연장으로 인식되거든요.”
알룸 1층에 입주한 식당 샹베리는 낮에는 커피와 덮밥을, 밤에는 한 팀에게만 코스 요리를 내놓는 원테이블 다이닝으로 운영된다. 매장 앞엔 작은 벤치 두어 개를 내놓아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리를 쉬어가게 했다. ‘도로와의 소통’은 2층 매장으로도 이어진다. 세무법인이 입주한 202호의 창문은 아래로 나 있어 거리가 훤히 들여다 보인다. 바깥 시선을 피하기 위해 2층의 창문을 약간 위로 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주민과 입주자 간에) 서로 보여주고 보자는 거예요. 만약 여기 건축사무소가 있었다면 창틀에 건축 모형을 전시해 거리를 장식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겠죠. 저는 이런 식의 소통이 동네의 지역성을 회복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주민들이 저 건물에 어떤 회사가 있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아는 것만으로 미세한 친밀감이 형성될 수 있어요.”
동네의 풍경이 되고자 하는 시도는 테라스로 이어진다. 외벽에 음각, 양각으로 다채롭게 새겨 넣은 테라스는 거주자에겐 탁 트인 외부공간을, 주민들에겐 식물이 담긴 거대한 화분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건축가는 “처음 계획한 것보다 식물이 많이 담기지 않아 아쉽다”며 웃었다.
“건물을 직접 이용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건물이 해야 할 역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필지 안에서 폐쇄적으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바람과 햇살과 시선을 자유롭게 들이는 것, 저는 이게 건물이 동네에 화답하는 한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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