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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8.19 04:40

[SF, 미래에서 온 이야기] 왜 늘 결말이 애매할까… “문명의 미래는 답이 없다”

등록 : 2017.08.19 04:40

<24>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1

80년대의 추억 ‘미래소년 코난’

선악 이분법, 교훈적 결말 없이

문명 파멸 이후 심도있게 고찰

#2

자연과 인간의 갈등 주된 소재

권선징악 아닌 화해ㆍ공생 다뤄

21세기 윤리 고민하는 예술가

#3

소년기 ‘밀리터리 오타쿠’ 경험

과학기술적 디테일 묘사 뛰어나

휴머니즘과 결합, 거장으로 성장

봉준호 감독의 최근작 ‘옥자’에는 놀라운 신체 능력을 지닌 산골 소녀가 등장한다. 맨몸으로 유리문을 깨부수고, 달리는 자동차에서 떨어지고도 멀쩡하게 일어나 다시 차에 오른다.

봉 감독은 이 소녀의 캐릭터를 자신이 흠모하는 어느 애니메이션에서 따왔다고 밝힌 바 있다. 그 작품은 다름 아닌 ‘미래소년 코난’이다. 한국의 30~40대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이 TV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소년 코난이 바로 ‘옥자’의 히로인인 미자의 원형이다. ‘미래소년 코난’은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거장인 미야자키 하야오가 처음으로 감독을 맡아 연출했던 작품이다.

놀라운 디테일이 빚어내는 몰입감

‘미래소년 코난’은 1978년에 일본 NHK에서 처음 방영했으며 한국에서는 1982년에 KBS에서 선을 보인 것을 시작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방송사에서 재방송을 했다. 주제가나 등장인물, 설정 등은 같은 세대라면 누구나 공유하는 추억 요소로 자리 잡았고, 미래세계 전망과 관련해서는 문화적 유전자인 밈(meme)의 수준까지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현대 문명의 파멸과 그 이후의 세계를 그린 스토리텔링 영역에서 ‘미래소년 코난’이 남긴 잔영은 무척 짙고 길다.

추억의 SF만화 연속극이라면 ‘미래소년 코난’보다 앞서서 나왔던 ‘우주소년 아톰’이나 ‘마징가 Z'를 꼽는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들 역시 지금까지 회자되는 명작들이며, SF만화사에 새긴 족적도 뚜렷하다. 아톰의 원작자 데즈카 오사무와 ’마징가 Z'의 작가 나가이 고는 만화의 영역을 넘어 일본 문화사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거장들이다. 그러나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들과 다른 점은 ‘현실적인 디테일’에서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 이야기의 설득력을 독보적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앞의 두 작품이 과학적 합리성과는 거리가 있는, 글자 그대로 ‘만화적 상상력, 만화적 연출‘에 충실한 반면, ’미래소년 코난‘은 작품 안에서 구현되는 현실성이 무척 생생하다. 게다가 공업 중심의 ’인더스트리아‘와 농경 중심의 ’하이하버‘로 상징되는 체제의 직접적인 대비도 청소년 관객들에게 세상에 대한 심층적 시각을 갖도록 유도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만화적인 부분은 등장인물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처음 감독한 TV 만화 연속극 ‘미래소년 코난’. 한국일보 자료사진

봉준호 감독은 ‘옥자’에서 괴력을 가진 소녀 미자의 캐릭터를 흠모하는 작품 ‘미래소년 코난’에서 따왔다. 넷플릭스 제공

섣부른 희망을 내세우지 않는 작품세계

‘미래소년 코난’으로 이미 많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역량이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1984년에 내놓은 장편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이다. 고도의 과학 문명을 이룩한 인류가 종말전쟁을 벌인 끝에 멸망하고 나서 1,000년 뒤, 독성 가스를 내뿜는 숲에 밀려나 바람 부는 바닷가에서 살아가는 작은 왕국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주요 줄거리는 사람들 간의 갈등을 봉합하고 자연과 공생하는 새로운 문명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주인공 소녀 나우시카의 영웅적 활약이지만, 그 배경에 깔린 설정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자연 생태계는 인간이 만들어 낸 독성 물질을 정화하기 위해 스스로 진화하며 그 과정에서 독성 물질의 근원인 인간을 ‘해독’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즉 숲이 내뿜는 가스는 인간에게는 유해하지만 자연계 전체에는 이로운 물질이다. 주인공 나우시카는 정화가 끝난 지대에 사는 식물은 인간에게 유해한 가스를 방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사람들을 설득하여 자연 생태계를 적대의 대상이 아닌 공생의 동반자로 포용하자고 설득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인류 문명의 미래를 낙관이나 비관을 전제하지 않고 성찰하고 있다. 한국영상투자개발 제공

여기까지 보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아름다운 마무리로 끝나는 듯하지만, 사실은 이 내용이 다가 아니다. 원래 이 작품은 하야오가 1982년부터 잡지에 연재하던 같은 제목의 만화에서 1~2권 부분만 반영한 것으로, 그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애니메이션을 발표한 뒤에도 연재를 계속 이어나가 1994년에야 완결한다. 전 7권으로 이루어진 이 원작 만화야말로 문학, 영화, 만화 등 모든 장르의 유토피아/디스토피아 텍스트들을 통틀어 인류 문명의 운명에 대한 가장 심도 깊은 고찰 중 하나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이 원작은 어떠한 편향된 시각이나 섣부른 도그마도 내세우지 않으며 단지 인류와 문명의 복잡한 속성을 끊임없이 곱씹고 분석하도록 독자에게 숙고를 요구한다. 나우시카는 옛 인류의 집단 지성을 담은 AI에게 찬란한 문화유산에 둘러싸여 안온하게 지내는 삶을 제안받지만, 결국 불확실한 미래를 택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강인한 의지 외에는 무엇 하나 기댈 구석이 없다.

바로 이런 점이 하야오만의 독특한 입장이다. 그의 다른 작품들, ‘원령공주’나 ‘천공의 성 라퓨타’,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등을 봐도 결말은 늘 명쾌하지 않다. 희망이나 교훈이라 할 만한 귀결도 없이 그저 현실의 복잡함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자, 이제 다 같이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서 캐릭터들이 엮어 내는 드라마는 분명 마음을 울리게 하지만 그조차도 정서적 감동 코드와는 결을 달리한다. 어찌 보면 가장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하야오 본인도 ‘답이 없어서’라고 말한다는데, 바로 이런 태도야말로 20세기를 거쳐 21세기로 넘어 온 과학기술 사회에서 이제껏 생각해 본 적 없는 새로운 윤리에 고민하는 현대 예술가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 대원 C&A홀딩스

기계 매니아에서 휴머니스트 거장으로

기계와 기술의 미학을 친숙하게 즐기는 ‘20세기 소년’. 미야자키 하야오의 성장기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그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비행기 부품을 만드는 회사의 공장장이었다고 한다. 하야오는 어릴 때부터 비행기 날개 조립 장면 등을 보며 자랐고 2차 대전을 거치면서 탱크나 총기 등 군사용 무기류에 탐닉했다. 요즘 말로 ‘밀덕’, 즉 ‘밀리터리 오타쿠’였던 것이다.

성년이 되면서도 기계 애호 성향은 여전했지만 한편으로는 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직접 경험한 데서 오는 세상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그는 세 살 때 미군기의 공습을 피해 도쿄의 집을 떠나 시골로 피난했으며, 1950년이 되어서야 다시 돌아왔다. 어릴 때부터 주변에 군인이나 기술자들이 많았지만 대부분 2차 대전에서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싫었다고 하며, 대학생 시절에는 학생운동의 영향으로 진보적 이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세상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자신의 진로를 그 쪽으로 잡게 된다. 훗날 그의 작품들이 성공한 것은 기계 묘사 등의 디테일에서 보여주는 철저한 고증 수준이 심도 깊은 휴머니즘적 입장과 결합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바탕에는 바로 그러한 성장기의 배경이 녹아들어 있다.

우리나라는 2000년대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일본 문화의 공식적인 수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오래 전부터 TV에서는 ‘미래소년 코난’을 비롯한 일본 만화연속극들을 방영해 주었지만 원작이 일본 만화라는 사실은 철저히 감추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비롯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장편 애니메이션들은 복사한 비디오테이프로 대학가 등에서 숱하게 상영회가 열리곤 해서, 정작 일본 문화가 전면 개방되었을 때에는 이미 하야오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미래소년 코난’에서 인더스트리아가 몰락하는 장면이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말하는 친환경적 메시지 등을 보고 미야자키 하야오를 자칫 반과학주의에 경도된 인물로 오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는 미래의 희망을 위해 현실의 다양한 입장들이 상충하는 상황을 먼저 인정하자는 생각이다. 21세기로 접어들고 4차 산업 혁명까지 운위되는 시대에, 하야오의 그러한 생각은 가장 진지한 출발점이 될 자격이 충분해 보인다.

박상준ㆍ서울SF아카이브 대표

2005년 베니스영화제에서의 미야자키 하야오(왼쪽) 감독. 리안 감독에게 황금사자상을 시상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미야자키 하야오

1941년 1월 5일~.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이자 만화가. 도쿄에서 비행기 부품 제작회사를 경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쿠슈인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했으나 소년시절부터 희망하던 애니메이터의 길을 가기 위해 토에이 동화에 입사했다. 그 뒤 몇 군데 회사를 옮겨 다니며 두각을 나타내었고 1984년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발표한 뒤 자신의 회사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한다. 그 뒤 내놓는 작품마다 엄청난 호응을 이끌어내며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은 일본 영화 역대 흥행수입에서 10위권 안에 들어간다. 2013년에 ‘바람이 분다’를 발표한 뒤 장편은 이제 만들지 않는다며 은퇴를 선언했으나 2016년에 다시 복귀하여 현재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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