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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명예훼손죄의 남용을 우려한다

입력
2014.09.2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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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사이버 공간에서의 허위사실 유포에 강력 대처하겠다고 나섰다. 박근혜 대통령이 ‘사이버상의 국론분열’을 언급한 데 따른 후속조치다. 관련 공공기관 뿐만 아니라 네이버, 다음 등 민간업체들까지 모아 놓고 상시모니터링, 선제적 대응, 전담수사팀 구성, 실형 선고 유도, 구속수사 원칙, 최초 유포자 뿐 아니라 확산ㆍ전달자도 엄벌하겠다는 등 전방위 대응책을 내놓았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준사법기관이 부랴부랴 나서는 모양새도 문제지만,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명예훼손죄’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명예훼손죄의 가장 큰 문제는 그 활용이 수사기관의 의지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는 점이다. 원래 명예훼손죄는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사회적 평가인 ‘명예’를 훼손시키는 행위를 규제하는데 목적이 있다. 하지만 명예의 보호가 아니라 사회혼란을 막는다거나 공공질서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국가가 나서 명예훼손죄가 활용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에 따라 처벌대상이 자의적으로 선별되고 적용범위가 고무줄처럼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명예훼손죄가 이렇게 오도된 목적을 위해 동원되면 법원의 유죄판결을 받아내지 못한 경우에도 소기의 목적이 달성된다. 나중에 무죄판결이 나오더라도 당사자는 이미 수사과정에서 만신창이가 되고 난 이후이고, 잠재적 비판자들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한 위축효과를 거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번처럼 검찰이 구속수사와 실형선고 유도 등 선제적인 수사를 감행한다면 위축효과는 더할 나위 없이 커진다. 이 때 개인의 명예 보호라는 본래 목적은 온데 간데 없어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명예훼손죄 자체가 아예 없거나 사실상 사문화되어 있다. 우리나라처럼 징역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나라는 더더욱 적다. 명예훼손 문제에 대해서는 국가가 직접 개입하는 형사처벌보다는 개인이 개인에게 명예회복을 청구하는 민사배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개인이 당한 명예훼손에 대해 법이 개입할 수 있게 하되, 국가가 자의적으로 명예훼손죄를 적용할 여지는 차단하는 것이다. 최근 유엔의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이나 유엔 인권옹호자 특별보고관 등도 한국정부에 대해 명예훼손죄를 폐지할 것을 잇달아 권고한 바 있다. 개별 국가들의 관행으로도 국제기준으로도 명예훼손을 형사처벌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것이다. 명예훼손 위반에 대해 전담수사팀까지 꾸려서 실형 선고를 받아나겠다는 검찰의 처사를 곱게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도 명예훼손죄를 폐지하는 것이 마땅해 보이지만 이런 저런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면 최소한 적용범위만큼은 줄여야 한다. 이미 국회에는 이런 취지의 법안들이 발의되어 있는 상태다. 여기에는 징역형을 폐지하고 벌금형만 유지하는 것,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폐지하고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만 남기는 것, ‘허위임을 알면서’, ‘심각하게’ 등을 구성요건에 포함시키거나,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거나 공적 관심사안인 경우 또는 상대방이 공인ㆍ공직자인 경우에 위법성을 조각하여 적용범위를 좁히는 것, 친고죄로 전환하여 국가의 자의적 개입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 등의 구체적 대안들이 담겨 있다. 이렇게 명예훼손죄의 적용범위가 줄어들면서 남는 공백이 있을 수 있다. 악의적인 개인정보 유출이나, 차별적 혐오표현, 반복적인 스토킹, 집단괴롭힘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도 명예훼손죄를 동원하기보다는 해악의 성격과 범위를 특정하고 필요한 법적 조치들을 다원화한 입법으로 정밀하게 접근하는 것이 효과도 좋고 부작용도 적을 것이다.

명예훼손죄에 부정적인 쪽은 대개 진보진영인 것 같다. 국가가 법을 동원해서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억누르는 것에 비판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예훼손죄의 적용범위가 축소된다면, 보수인사들의 허위사실 유포 또한 형사처벌로 대처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명예훼손죄 문제는 이념적 당파성을 떠나 시민사회의 공정한 토론규칙을 마련하는 일이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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