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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대통령의 침묵, 그 잔인한 불통

입력
2016.08.2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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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의 옛 일본대사관 앞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평화의 소녀상'. 연합뉴스
서울 종로구의 옛 일본대사관 앞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평화의 소녀상'. 연합뉴스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그는 열다섯 살이었다. 군복 만드는 공장이라 듣고 끌려간 곳은 대만의 위안소였다. 서른 명이 넘는 소녀들과 함께 매일 일본 군인들을 받았다. 평일엔 하루 평균 15명, 주말엔 50명이 넘었다.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로 끌려 다니는 동안 그는 인격이 말살된 채 성기로만 존재했다. 임신해 태아와 자궁이 끄집어내진 소녀, 도망치다 붙잡혀 발목이 잘린 소녀, 매독으로 죽어 불태워진 소녀보단 그래도 어쩌면 운이 좋았다. 1992년 1월, 위안부 피해자라고 고백했다. 가족과 이웃들은 떠났고 그는 혼자가 됐다.

24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1,245번째 수요 집회’에서 그를 만났다. 김복동(91) 할머니. 그는 희망도 평화도 없는 얼굴로 정오의 뙤약볕 아래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는 후안무치한 일본 정부와 24년 동안 싸웠다. 지난해 12월 한국과 일본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급하게 맺은 뒤로는 한국 정부와도 싸우는 처지가 됐다.

“정부가 할머니들의 청춘과 자존심을 헐값에 팔아 넘기려 하잖아요. 할머니들을 지켜 드리려고 왔어요.” 교복 차림으로 수요집회에 나온 여고생들의 외침. 김 할머니와 위안부 피해자들이 무엇과 싸우는지, 국민이 그 싸움을 어떻게 보는지가 함축돼 있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 정부는 진실 규명이 빠진 ‘화해’, 반성도 용서도 없는‘치유’를 외롭고 가난한 피해자들에게 강권했다. 법적 배상금이 아닌 위로금으로 일본이 보낼 10억엔(약 110억원)으로 만든다는 위안부 재단은 ‘수치와 망각의 재단’이라는 비웃음을 샀다. 정부가 생존 피해자 1억원, 사망 피해자 2,000만원의 위로금 액수를 발표하는 사이에 일본은 사죄와 참회의 책임을 훌훌 벗어버리려 하고 있다.

불신과 논란을 키운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침묵과 외면이다. 박 대통령은 “위안부 합의 비판은 없는 문제를 자꾸 일으키는 정치적 공격”(1월 기자회견)이라 일축하고 “합의는 절박한 심정으로 집중적이고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3ㆍ1절 기념사)라고 자찬한 뒤로 입을 닫아 버렸다. 나라 잃은 아픔을 되새기는 날인 광복절 경축사에서 박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를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은 충격이었다. 경술국치일인 29일 열린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 기자, 오늘 레이저 맞았네!” 박 대통령의 1월 기자회견이 끝난 뒤 청와대 참모들이 다가와서 말했다. 레이저는 ‘껄끄러운 질문을 한 기자에게 박 대통령이 보내는 싸늘한 눈빛’의 은유.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나 이해를 구할 것인가”라고 물은 것이 나의 죄목이었다. 박 대통령은 “뵙게 될 기회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답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박 대통령의 침묵은 “위안부 합의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박대통령은 위안부 합의를 언급하면 안 되는 불편한 존재로 만들어 스스로 그 가치를 깎아 내렸다. 박 대통령은 당당하지 못했다.

합의에 반대하는 피해자가 단 한 명 남는다 해도, 박 대통령은 그가 이해할 때까지 위로하고 설득해야 한다. 위안부로 끌려간 소녀 20만명을 대신해 살아 남은 한 명, 살아 돌아온 2만명의 한과 용기를 끌어 모아 고백한 한 명이므로. 정부 인사들은 오히려 합의 후폭풍의 책임을 피해자들에 돌렸다. “합의에 반대하는 분은 생존자 40명 중 열 명도 안 되는데, 제대로 배우지 못한 그 분들이 특정 세력에 휘둘리는 게 문제”라면서.

돈이 아닌 진심을 담은 사과가 먼저라며 가슴을 치는 피해자들을 ‘좌파 애물단지’로 만들어 정부가 얻으려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박 대통령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까지 ‘불통’일 줄은 몰랐다.

정치부 최문선 차장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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